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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Oct 28. 2023

여자와 잘 지내는 방법<하나레이 해변>

하루키의 한마디

나는 서핑을 좋아한다(물론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서핑은 다른 스포츠보다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아무 때고 즐길 수 없다. 알맞은 파도와 바람, 날씨 등의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또 한국은 서핑 포인트도 적고 접근성도 나쁘다. 파도의 크기도 작고, 금세 부서져버린다. 큰맘 먹고 서핑하러 갔다가 파도가 아예 없거나 사람이 너무 붐벼 제대로 즐길 수 없었던 적도 있다. 


서핑의 진정한 즐거움을 맛본 사람들이라면, 해외의 유명한 서핑 포인트에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푸켓, 발리, 다낭의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바다 위로 작열하는 태양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들, 그 위를 누비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황홀해진다. 그러나 내게는 오랫동안 간직해 온 두려움이 있는데, 바로 상어와의 조우다.



무라카미 하루키『도쿄기담집』, 「하나레이 해변」

사치는 하와이 하나레이 해변에서 서핑하던 아들이 상어의 습격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어의 공격으로 인한 쇼크로 익사했다. 그녀는 무릎 아래가 사라진 아들의 시신을 마주한다. 아들의 어깨를 잡고 흔들면, 부스스한 얼굴로 당장이라도 투덜거리며 일어날 것만 같다. 자질구레한 절차를 처리하던 사치에게, 담당 경관이 말한다. 


사치는 매년 아들이 죽은 하나레이 해변을 찾아 삼 주일쯤 머무른다. 해변에 앉아 서퍼들이 바다로 나갔다가 파도를 타고 해안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본다. 그녀는 그의 아들을 사랑했지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좋아하지는 않았다. 제멋대로에 공부는 하지 않고 서핑으로만 세월을 보낸다. 사치 역시 요리를 배우러 갔던 미국에서 피아노만 치며 세월을 보냈으니, 그의 아들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었다. 남편은 집에서 폭력을 일삼다가, 여자와 약에 빠져 요절했다. 그래서 피아노 바를 운영하며 혼자 키운 아들이었다. 일이 너무 바빴고, 사내아이의 심리나 신체에 지식이 없었으며, 엄하게 키우지도 못했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 포스터


여느 때처럼 하나레이 해변으로 향하던 사치는 가는 길에 일본인 청년 둘을 태워준다. 그들은 아마도 그녀의 아들이 그랬을 것처럼 싱그러운 모습으로 파도를 탄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이 사치에게 외다리 일본인 서퍼 얘기를 한다. 사치의 아들이 탔던 것과 같은 보드를 들고, 사치의 아들처럼 오른쪽 다리가 없었던 그는 사치가 늘 앉아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무에 몸을 기대어 서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사치는 해변을 수없이 걷지만, 그 외다리 서퍼를 만날 수는 없었다. 어째서 그의 아들은 그녀한테는 나타나지 않을까. 그녀는 자격이 없는 걸까. 어찌 됐든 그녀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여자와 잘 지내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어. 첫째, 상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줄 것. 둘째, 옷차림을 칭찬해 줄 것. 셋째, 가능한 한 맛있는 걸 많이 사줄 것.

일본에 돌아오고 나서, 카페에서 우연히 일본인 서퍼 둘 중 한 명을 만난다. 작고 예쁘장한 여자애와 함께 있었던 그는, 사치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 여자애와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조언을 구한다. 사치는 그에게 위와 같이 말한다. 


사치는 매일 밤 피아노를 친다. 피아노를 치지 않을 때는 하나레이 해변을 생각한다. 사치를 기다리고 있을 바다, 구름, 앨버트로스 그리고 무언가에 대해 생각한다. 


파도를 기다리다

사치의 아들은 왜 그녀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가 '존재'한다는 메시지만 보냈을까? 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살펴보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고 어머니는 매일 밤 피아노를 치러 나갔다. 더구나 그녀는 사귀는 사람이 그때그때 있었다. 그녀는 죽은 남편을 닮은 아들을 볼 때마다 아픈 기억이 떠올라서 애써 그를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용돈은 많이 받았지만, 애정은 부족했을 것이다. 공부는 딱히 적성도 안 맞고 재미도 없다. 우연히 해본 서핑에서 재능과 재미,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기분을 경험한다(서퍼라면 공감할 수 있다). 더 큰 파도를 타기 위해 나갔던 하와이의 먼바다에서 상어의 공격을 받는다. 충격과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그대로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사치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아들 또한 사치를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만 같다. 그러나 사랑했다. 사치가 매년 하나레이 해변에 아들을 기리러 오는 것처럼, 그도 사치가 늘 앉아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사치와 그가 서로 느꼈던 거리감만큼—자리에서 그녀를 그리워했으리라.


아들을 기다리다 <Hanalei bay> 2018


사치가 다시 만난 서퍼 청년에게 건넨 한마디를 곱씹어 보면, 가슴속에서 애잔함이 피어오른다. "여자와 잘 지내는 방법"이라는 주어가 그렇다. 여자친구를 만드는 방법이 아니다. 사치 역시 어머니 이전에 여자였다. 남편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여자. 바다에 아들을 빼앗긴 여자. 결국 사치가 말한 세 가지 방법은, 사치가 그의 남편 혹은 아들에게서 원했던 것들이 아닐까.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줄 것, 옷차림을 칭찬해줄 것, 가능한 한 맛있는 걸 많이 사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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