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덩 Oct 16. 2023

당신은 우연히 이 글을 읽고 있다<우연 여행자>

하루키의 한마디

살면서 기막힌 우연의 일치가 일어났던 기억이 있는가? 해외여행 중 만났다가 헤어진 상대와 약속 없이 재회하기도 하고, 환승할 때마다 버스며 지하철이 제시간에 도착해 주기도 한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는 ‘신기한 TV서프라이즈’나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도 대부분 우연의 일치에서 그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로 말하자면, 카페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듣고 싶은 노래가 재생되기 시작한 적이 있다. 또, 로또 번호 4개를 우연히 맞춰 4등에 당첨된 경험도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우연이 과연 ‘우연히’ 일어났을까? 해외여행 중 만났던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상대의 일정에 맞춰 서성거렸을지도 모른다. 대중교통은 시간표에 맞춰 운행됐을 뿐이며, 자주 가던 카페에서 때마침 흘러나왔던 음악은 내가 익숙해진 플레이리스트의 순서였을 뿐일지도 모른다. 내가 매주 로또를 산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6개 중 4개를 맞추는 건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연이라는 건 생각보다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당신이 시간 여행자라면 우연 만들기는 더 쉽다  <어바웃타임>


무라카미 하루키『도쿄기담집』, 「우연 여행자」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는 ‘그’는 어린 시절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밝히고 가족과 멀어진다. 커밍아웃으로 각별했던 누나의 결혼에 문제가 생기고, 그 때문에 누나와도 절연하게 됐다. 어느 날, 카페에서 ‘우연히’ 같은 책을 읽던 여자와 마주치고, 이를 계기로 그녀와 친해진다. 두 번째 만남에서 그녀는 그와 '조용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만, 그는 자신이 게이란 걸 밝힌다. 사실, 그녀는 유방암 의심으로 인한 재검진이 예정돼 있었고, 불안함과 두려운 마음에 그와 같은 일탈을 저지르려 했다고 한다. 조율사는 그녀를 위로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그녀의 귓불에 점을 발견하고 먹먹한 그리움을 느낀다. 누나도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십 년 만에 누나에게 전화하고, 그녀가 유방암을 진단받고 절제 수술이 예정돼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우연의 일치라는 건 어쩌면 매우 흔한 현상이 아닐까라고요. 즉 그런 류의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그야말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중략)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분명 우리 시야에 일종의 메시지로서 스르륵 떠오르는 거예요.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누나와 화해하고 끌어안기를 원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했고, 카페에서 만난 여자가 그 계기가 되었다. 꼭 그 카페에서, 그 책을 읽던, 그녀여야 했을까? 그렇지 않다. 다만 그가 오랫동안 찾아왔던 계기에 그녀가 들어맞았을 뿐이다. 물론 그녀와 누나 모두 유방암과 귓불의 점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지만, 복권으로 따지자면 번호 6개 중 2개가 일치하는 정도의 우연일 뿐이고, 이는 낙첨이다. 그녀와의 만남과 누나와의 화해는 우연이었다기보다는 그가 우연이라고 이름 붙인, ‘매우 흔한 현상’ 중 하나였다.


엄마는 항상 말했어요 기적은 매일 일어난다고 <포레스트 검프>

기적은 매일 일어난다. 다만, '여행자'만이 그 기적을 나만의 특별한 우연으로 읽어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을 여행하지 않는다. 매 순간이 단조롭고 다른 어딘가로 멀리 떠나고만 싶다. 그러나 서울을 여행하러 온 사람들은 다르다. 한강 위를 지나가는 지하철에서의 풍경에서, 아기자기한 동네의 벽화들과 구불구불한 골목길에서 감명받는다. '여행자'의 마음과 눈을 가졌을 때만 보이는 새로움과 아름다움이 있다. '우연 여행자'란 일상을 우연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연을 만들까. 그거야 재밌으니까. 장난처럼 말했지만, 우연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한다. 우연히 가문의 원수 집안 외동딸과 사랑에 빠지고, 우연히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가 스틱스 강에 담가지지 않았으며, 우연히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만나 도원결의를 한다. 우연은 항상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우연을 만들어 보자. 소나기 내리는 날 그녀는 '우연히' 우산이 없고, ‘우연히’ 당신은 여분의 우산이 있다면? 필요한 재료는 간절히 원하는 마음과 조금의 센스뿐이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바램이었어    노사연, 만남, KBS 콘서트 7080


이전 08화 여자 없는 남자들 번외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