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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Oct 05. 2023

어서 오세요 여자 없는 남자들 클럽에<여자 없는 남자들

하루키의 한마디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성적으로 흥분한다. Theme from a summer place (Percy Faith version)

하루키의 책을 읽으며 이야기 내에서 언급된 음악들을 찾아 들어보는 것 또한 쏠쏠한 재미다. 누군가가 "하루키의 소설 속에는 음악이 흐른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그의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음악이 존재하며, 단순한 BGM이 아니라 분위기를 형성하거나, 그 이상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소설가들은 퇴고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에서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작업을 끊임없이 거치는데, 다시 말하자면 소설 속 음악들은 그 이야기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여자 없는 남자들」의 <A summer place>를 들으면 여름철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진 피서지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장면이 떠오르고는 한다. '엠'은 이렇게 말했다. "천국에선 분명 BGM으로 퍼시 페이스의 음악이 흐를 거야." <13 jours en france>는 우리나라에서 '겨울연가'에 삽입되어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노랜데, 이미 세상을 등진 엠을 향한 멜랑콜리한 감정을 자아낸다. '나'가 <Moon River>를 들으며 엠의 등을 쓰다듬었던 순간을 회상하는 장면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노래를 통해서만 전해지는 애틋함이 분명히 있다.


어떤 사람이 듣는 음악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사람에 관한 인상이 달라졌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재즈, kpop, 락, 인디, 발라드, 클래식 등 각각의 장르가 가지는 오묘한 특성이 그 사람에게 투영된다. 등장인물이 즐겨 듣는 음악들을 따라 들으면, 그들의 이미지가 더 또렷하게 상상되기도 한다. 또는, 그들에게 깊게 동화되거나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같은 음악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 쉽게 끌리는 것처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500일의 썸머>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여자 없는 남자들」

‘나’는 한밤중 걸려 온 전화로 한 여자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을 통보받는다. 그녀는 그의 전 여자친구였으며, 전화를 건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다. 그는 아내가 지난주 수요일 자살했다고 알린 뒤 전화를 끊는다. ‘나’는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어 그녀를 추억한다. 


하루키 특유의 상실감과 멜랑콜리함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녀는 왜 자살했을까? 하루키의 작품에서 어떤 사건의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명확하지 않은 인과관계는 나름대로 추리의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하루키는 마치 힌트를 건네는 것처럼, 이런저런 암시를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나’는 “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사귄 여자들 중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세 번째 사람이 되었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분명 “상당한 치사율”이다. 또 “그게 내 탓이 아니었으면 한다. 거기에 내가 관여되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읊조리는데, 왠지 모를 죄책감이 느껴진다. 물론, 단순한 우연일 수도, 우울한 분위기의 여성이 취향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반복해서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일 타입도 아니다."라고 되뇐다. 분명 중요한 퍼즐 조각이 빠졌다.


남편이 새벽 한 시에 전화를 걸어 아내의 죽음을 전한 사실도 꽤 의미심장하다. 정확한 시간의 흐름을 알 수는 없지만, 지난주 수요일에 죽었다고 언급했기에 적어도 일주일 정도 시간이 흐른 상태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남편은 새벽 한 시에 '굳이' '전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야만 했을까? 아내가 ‘나’를 여전히 추억하고 있었기에, 그녀를 위해 예를 갖췄다고 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의 부고를 전하고 장례식에 참석해 조의를 표하게끔 하지 않았을까? 일종의 복수라고 생각해 볼 여지도 있다. ‘나’로 하여금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끔 만들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이는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 사건의 전말을 알 방법도 없다. ‘나’가 '엠'과의 사랑을 추억할 땐 순수한 애틋함이 넘쳐흐른다. 그는 어린 시절, 그녀와 사랑에 빠진 순간을 기억한다(가정한다). 지우개를 빌려달라는 그의 부탁에, 그녀가 웃으며 자신의 지우개를 둘로 잘라 건네준 순간이었다. 나와 비슷한 시대를 공유하는 사람이라면, 그 시절 지우개가 가졌던 남다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완벽한 소녀 앞에서 추잡하게 발기 같은 걸 할 수는 없잖아.” 하루키가 성과 사랑을 연결 짓는 방식은 언제나 흥미롭다. 일반적인 남자라면, 의도에 상관없이 발기하는 시기가 있다. 어쩌다 여자와 몸이 살짝만 닿아도, 심지어는 지나치는 샴푸 냄새만으로도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고는 한다. 그런데 정말로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여자를 만나면, ‘발기’ 같은 건 초월해 버린다.


깨끗하게 잘 지워지는 새 지우개. 지금도 그 고무냄새는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진: Unsplash의Daniel Shapiro


그렇다면 ‘나'는 왜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와 헤어져야 했을까. 대부분의 이별이 그렇듯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잠깐씩은 눈을 돌리게 마련이다. 잠도 자야 하고 화장실에도 가야 한다. 욕조도 청소해야 한다. 양파를 다지거나 강낭콩 꼭지를 따기도 한다. 자동차 타이어 공기압을 점검할 필요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이별이 허드렛일, 생리 욕구와 같은 층위에 존재한다. 이별 후 괴로움과 고뇌, 슬픔은 계측하고 싶을 만큼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우리’가 ‘남’이 돼버리는 것은 그렇게나 쉽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건 여자 없는 남자들이 아니고는 이해하지 못한다. 근사한 서풍을 잃는 것. 열네 살을 영원히ㅡ십억 년은 아마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리라ㅡ빼앗겨버리는 것


사랑한다는 건 시간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함께한다는 건 내 한정된 삶을 나눈다는 뜻이다. 즉,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건 내 목숨을 너에게 조금씩 할애한다는 것과 같다.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가 사라지면,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 여자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여자와 함께했던 시간이 같이 사라진다. 그 상실감은, 마치 그만큼의 수명이 깎이는 고통과 같다. "열네 살을 영원히 빼앗겨버리는 것"처럼. 다시 채워지지 않는 시간의 공백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영원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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