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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Oct 11. 2023

여자 없는 남자들 번외편

하루키의 한마디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내 마음을 움직였던 문장들을 소개해 봤다. 누군가는 내 글에 공감할 수도, 누군가는 영 감흥이 없을 수도 있겠다. 느끼고 받아들이는 감상은 저마다 다르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몇 마디 인용만으로, 이야기가 전하는 감동을 온전히 즐기려는 건 욕심이 아닐까 싶다. 다만 내가 전하는 문장과 이야기로 누군가 책에 흥미를 가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의 바람이자 보람이겠다.


문장 선별은 지극히 주관적이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편법으로 아껴뒀던 문장들을 한번 꺼내본다. 다음 책 <도쿄 기담집>으로 넘어가기 전 일종의 쉬어가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하루키의 에로티시즘

"저기, 등 좀 쓰다듬어줄래?"
"그럼. 물론이지." 나는 말했다.
"당신은 등을 정말 잘 쓰다듬어."

<여자 없는 남자들> p335

등을 잘 쓰다듬는 건 어떤 걸까? 손가락으로 훑듯이 해야 할까 아니면 손바닥 전체가 닿아야 할까? 직선 혹은 타원을 그리며 왕복해야 할까 아니면 한 부분에서 문지르듯이 움직여야 할까. 글의 한계가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침대에 누운 연인의 맨등을 쓰다듬는 상상을 해본다. 애틋하고 에로틱하다. 쓰다듬는 건 멋진 사랑의 표현이고, 나도 잘 쓰다듬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저기, 등 좀 쓰다듬어줄래?" 사진: Unsplash의Sinitta Leunen


하루키의 디테일

여자는 몸을 반으로 접은 채 오른손에 묵직해 보이는 검은 가방을 들고 마치 벌레가 기어가듯이 꾸물꾸물 계단을 올라갔다. 잠자는 난간을 잡고 그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그의 내면에 어떤 그리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사랑하는 잠자> p295

잠자가 느닷없이 자물쇠를 고치러 온 꼽추에게 사랑에 빠진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잠자의 전생(?)과 관련 있다. 그가 벌레였었기 때문에, '벌레가 기어가듯이'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에게 짝짓기의 본능을 느낀 것이다. '그의 내면에 어떤 그리운 공감'이라는 대목은 벌레였을 당시의 향수일 것이다. 또한 잠자는 그녀가 '굼실굼실 몸을 뒤트는 모습'을 보고 발기하는데, 이 '굼실굼실'이라는 단어가 낯설어 사전을 찾아봤다. 

출처 네이버 사전

'작은 벌레가 움직이는 모양'이다. 즉, '그레고르 잠자'로 깨어난 '나'가 '물맴이가 수면을 기어가는 것처럼 걷는' 꼽추 그녀에게 사랑에 빠진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벌레' 같았으니까. 


제가 아니고, 제 심장이 그런 겁니다

"그렇게 고추를 불뚝 세우고?"
잠자는 그 불룩한 것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이건 내 마음과 관계없는 일 같아요. 이건 아마도 심장의 문제일 거예요."

<사랑하는 잠자> p305

만약 중요한 순간에 예기치 못한 생리 현상이 일어났다면, 잠자의 말을 빌려 위기를 모면해 보자. 마음과 심장은 하나가 아니라서,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리기도 하니까.


슬픔 측정기 

슬픔을 간단하고 정확하게 계측할 수 있는 기계가 이 세상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여자 없는 남자들> p324

신라면 정도의 맵기. 매운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다. 일명 '신라면 지수'다(요즘에는 스코빌 척도를 사용하는데, 한국인은 이를 신라면 지수로 환산해야 한다). 왜 신라면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신라면이 어느 정도 매운 지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면이라는 단어만 상상해도 매콤한 맛이 입안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신라면 지수'를 사용할 수 있다. 슬픔도 계측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실패는 이만큼, 실연은 이만큼, 부고는 이만큼. 계측할 수 있다면 기록할 수 있고, 망각하는 일도 적어질 것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실연 후 또다시 사랑에 빠져버리는 사람처럼.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도 있다. 제 강아지 복구가 많이 아파요. 제 슬픔은 이 정도입니다, 부장님. 음, 정말 대단한 슬픔이구만. 오늘은 출근하지 말고 쉬도록 하게.


사실 복구는 건강히 잘 있습니다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은 못 받겠지만

"죄송합니다. 한심한 꼴을 보여드렸네요."
누군가를 위해 우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니라고 나는 말했다. 특히 세상을 떠난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독립기관> p164

세상을 떠난 소중한 사람을 위해 우는 사람을 만난다면, 이렇게 위로를 건네보고 싶다. 내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한심하게 보일 정도로 울어버리는 사람이고 싶다.



연애를 하루키로 배웠습니다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아주 많아요." 잠자는 말했다.

<사랑하는 잠자> p306

사랑에 빠진다는 건, 물어보고 싶은 게 아주 많아진다는 것.

"그런 게 아니고."

연애를 하루키로 배웠습니다2

"다니무라, 왜 그뒤로 연락 안 했어? 너하고 좀더 얘기하고 싶었는데."
"넌 나한테 좀 지나치게 아름다웠으니까." 나는 말했다.
그녀는 웃었다. "입에 발린 말이라도 듣기 좋은걸."
"입에 발린 말은 태어나 지금까지 해본 적 없어." 나는 말했다.

<예스터데이> p104

지나치게 아름다워 다가갈 수 없었던 사람을 만난다면 써먹어 보자. 다만 너무 자격지심이 느껴지게 말하지는 말 것.


맛있는 건 몸에 해롭더라

미사키는 차창을 내리고 시가 라이터로 말보로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맛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폐에 머금고 있다가 창밖으로 길게 토해냈다.
"명줄 줄이는 짓이야." 가후쿠가 말했다.
"사는 것 자체가 명줄 줄이는 거잖아요." 미사키가 말했다.
가후쿠는 웃었다. "그것도 하나의 견해이긴 하지."

<드라이브 마이 카> p54

나는 담배 냄새에 민감하기 때문에, 흡연의 이유를 이해하기는 힘들다(호기심에 해봤는데, 역시 모르겠다). 가후쿠의 말처럼 '명줄 줄이는 짓'을 돈을 내면서까지 구태여 하는 이유가 있나. 그러나 누군가 미사키처럼 쿨하게 대답한다면, 웃으며 수긍해 버릴 것만 같다. 게다가 우리 대부분 명줄 '빨리' 줄이는 나쁜 습관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으니까.


대학은 CC하는 데야

"대학은 시시한 데야." 나는 말했다. "들어와보면 실망할 거다. 틀림없어. 근데 그런 데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건 더 시시하잖아."

<예스터데이> p74

얼핏 들으면 맞는 얘기 같기도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닌 거 같기도 하다. 물론 기타루를 독려하기 위해 건넨 말이겠지만. 내게 대학은 세 번의 도전 만에 간신히 들어간 곳이었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별 볼 일 없는 대학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내게는 찬란한 추억들이 만들어진 멋진 곳이다. 조금 더 진지해져 본다면, 대학에 못 갔다고 해서 시시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누군가 "회사는 시시한 데야."라고 말을 꺼낼까 봐 두렵다.


소유욕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현실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 그것이 여자들이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셰에라자드> p214

하루키의 여성관은 종종 비판받고는 하는데,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 나는 소설이니까 뭐, 하고 넘겨버리는 편이지만. '남자 없는 여자들'이었어도 비슷한 비판을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각설하고,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 주는 특수한 시간'은 우리 모두 꿈꾸는,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문득 내게는 그 순간이 언제였는지 돌이켜본다. 아, 나도 여자 없는 남자들의 일원이었다.


최근에 봤던 불꽃놀이.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에 가까웠던 것 같다


기억해 줘

"좋은 생각입니다. 기억은 여러모로 힘이 되지요." 가미타가 말했다.

<기노> p232

기억은 '여러모로' 힘이 된다. 우울한 순간이면, 나는 기억들을 돌이켜 보고는 한다. 대학교 축제 때 밴드를 결성해 드럼을 연주했던 동영상(유튜브로 남아 있어 찾아볼 수 있다), 전여자친구와 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들(자주 보는 건 아니고, 가끔 보면 재밌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의 내 모습(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 어린 시절 주고받은 편지들, 외로울 때 썼던 시들. 그런 기억들은 언제나 힘이 된다. 모쪼록 우연히 내 글을 읽은 당신의 이 기억도, 언젠가 필요할 때 당신에게 힘이 되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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