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열등하지 않다.

눈에 보이는 재력과 재능의 불평등, 그 불편한 진실에서 자유를 꿈꾸다.

by Amyung

아들이 울고 있다.

세탁기 안으로 빨래통을 통째로 뒤집어 넣어 옷가지들을 탈탈 털어 넣으며 달그락 소리를 내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 어렸을 때부터 빨래는 꼭 돌아가면서 해야 했던 우리집만의 규칙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 결혼한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그런데 오늘은 그토록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내가 이상하게 옷가지를 하나하나 넣고 싶더라. 그래서 굳이 일일이 세어가면서 넣다가 뒤집어진 아들의 체육복을 발견했다. 아무 생각 없이 체육복을 다시 뒤집다가, 손이 떨려왔다.

”임대“

그토록 빨간색은 태어나고 처음본 것 같다. 아들의 체육복에 임대라는 글씨가 조롱하듯 삐뚤빼뚤 써있었다. 분명 써있었다. 그런데 박음질 한 듯 너무나도 선명했다. 놀란 맘에 아이를 불러 물었다. 실수였다. 아들은 체육복을 휙 낚아 채고는 얼른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내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고 아들이 울기 시작했다.

며칠 전 자기 친구 집은 4억이 올랐는데 우리 집은 얼마가 올랐냐는 아들의 물음이 떠올랐다. 우리집도 많이 올랐겠지라며 말꼬리를 흐리던 부끄러워 하는 내가 옆에 서 있다.

빨래를 해야하는데, 엄마도 울고 있다.

-'新주택계급 사회'에 대한 기사를 읽고-





몇 년 전에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아마도 "been born with a silver spoon in his mouth“라는 영어 문구에서 생겨난 것 같다. 이를 ‘수저 계급론’이라고 불렀었는데, 재력에 따라 일종의 계급이 나뉘어지는 것이 확장되어 이제는 위의 이야기처럼 ‘주택 계급 사회’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퍼져나가고 있다.


그런데 과연 금수저, 흙수저 이렇게 나뉘는 것 자체가 문제일까? 물론 문제가 될 수 있지만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재력의 차이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눈에 보이도록 다른건 사실이니까. 꼭 돈 말고도 모든 종류의 능력에 있어서 차등적으로 타고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 또한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타고난 이후에 시작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차이가 불평등이 되는 시작점은, 재능과 재력에 있어서 타고난 우위가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온다. '타고난 우위', '자신의 능력'. 단어만 놓고 봐도 모순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태어나보니 재능이 있는 것이고 돈이 많은 것인데 너무나 당연하게 그것이 내가 잘나서 얻은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없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렇게 ‘차이’ 속에 힘이 들어가고, 계급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돈이든 재능이든 자신의 능력이 타고났음을 인정한다면 사회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전보다 더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사람들한테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월함은 권력이 아닌 나눔의 이유가 될 것이다. 내가 많은 것이 내 잘남이 아니듯, 그가 적은 것도 그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은 많은 사람이, 없는 사람의 짐을 나누어 지는 사회가 될 것이다.


물론 모든 문제를 더 있는 사람들에게 지울 수는 없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자신이 더 많이 가졌고 그래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는, 자신의 인생이 불평등한 출발선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우월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라 기준이 어디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인데, 이상하게도 열등한 사람이 훨씬 많다. 그래서 사회 전반에 열정과 도전보다는 우울함과 피로감이 꽉 차있다.


현대인들은 극심한 성과주의 속에서 살고 있다. 같은 값이면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을 뽑으려는 사회에 살다보니 더 잘해야하고, 더 능력있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고 하는 경향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능력 없이 태어났고 돈 없이 태어났다면, 그것을 인정해야 할 때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얼마나 내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는지이다. 나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딜 가나 널려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의 가치를 판단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좋은 수저를 가지고 있는지 놓치기 쉽다.


그래도 뭔가 불공평한 것 같다면, 더 뛰어난 재능과 많은 부가 행복을 가져다 주는지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정말 다행이도 개인적으로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는 것은 재능, 재력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내가 열심히 하지 않는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것이 정말로 불행할 수 있다. 그것은 하루 하루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 중대하여 행복과 같은 가치는 쳐다볼 수 조차 없는 경우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개인이 해결할 수 없다. 삶의 가치를 바꾸는 측면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그 개인들이 모인 집단, 사회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복지의 목적이고 교육의 목적이다.


결국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수준의 부족을 넘어섰다면, 우월의 근본을 보는 동시에 나와 친해지며 참 즐거움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여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차이는 있으나 차이로 인한 계급은 없어질 것이다. 단순히 돈과 능력보다는 그 사람의 가치와 꿈과 그것을 이루어 가는 모습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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