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지칠 때면 생각나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아련한 추억.
한 번도 가본 적 없으나
언젠가 한 번 가본 적 있는 것 같은
마음 깊은 곳에 갈망이 뭉쳐져 만들어낸 나만의 장소
잡힐 것 같지 않은 그 불확실함을 타고
신기루 같은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
나에게 있어 최고의 여행이다.
가래떡 심부름에 집을 나섰다
우리 집 건너편에 있는 떡집
떡집인 듯 방앗간인듯하여 이름도 떡방앗간이다
내가 이 동네에 이사온지 어언 20년이 흘렀고
주변에 많은 가게들이 깨끗하게 바뀌어도
붉은 벽돌, 텅 빈 철제 기둥
세월이 쌓은 하얀 떡 내음 벗기지 않는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그런 떡집이다
그곳을 지키는 문은
오랫동안 손님을 걸러온 고집스러운 할아버지 마냥
잡고 있는 손잡이를 놓으면 금방이라도 제자리로 돌아갈 듯
나를 밀어내며 불친절하게 굴었다
그 불친절함을 밀어내고 들어가자마자
갖가지 떡이 뿜어내는 입김이 내 안경에 엉겼다
명절 점심이라 그런지 주인분 대가족이 식사하고 있었고
식사를 방해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떡집을 메우고 있었다
나온 순서대로 규칙 없이 선반에 올라있는 떡들과
분주하게 돌아가는 기계들
그리고 식사시간의 왁자지껄함이
떡방앗간의 분위기를 만든다
이 시대의 마케팅 전략이라는 도마 위에 올리면
그 어느 것 하나 지적을 피해 갈 수 없는데도
그런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인가 생각들 만큼
기분 좋은 활력으로 가득했다
이 활력에는 들기름도 한몫한다
떡방앗간의 기분 좋은 기운에 들기름 내음을 맡고 있노라니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꿈에선가 영화에선가 책에선가
왠지 한 번 가본 적 있던 것 같은
아무개 상회 옆 방앗간이 떠오른다
자전거는 꼭 문 앞에 한 대 정도는 서있어야 한다
기어도 없고 군데군데 녹슬어있는
바구니 달려있는 투박한 자전거 말이다
문은 역시 속이 빈 철로 된 미닫이문이다
기름칠한 지 꽤나 된 듯 두세 번에 나눠 열어야 하는 문 말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할아버지는 저기 티비 앞에 앉아계시고
할머니만 나와 손님맞이 하신다
주인 할머니께 들기름 한병 달라고 하면
무심한 듯싶어도 다 듣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그제야 일어나 저쪽 어디선가 들기름 한 병을 들고 오신다
꼬깃꼬깃 접힌 지폐 몇 장을
주머니 속 깊은 데서 꺼내 드리면
오래됐을까 연도를 확인하고 싶은 동전 몇 개 거슬러 받고
몇 번 사용했는지 모르는 검은 비닐에 담긴 들기름병 받아
문을 나온다.
콩 두부 찌는 담백 투명한 냄새 풍기는 두부집 지나치고
원색 가득 이불이 키만큼이나 쌓인 이불집 지나치고
늘 시골 할머니 댁 화장실에서 보던 보라색 고무 실내화 파는
시장 신발 집 지나쳐 나오면
물 따라 걷는 개울가의 돌벽 위에 앉아
두 다리 흔들거리며 잠시 쉬어가는 내가 보인다
도무지 내 의도로 걷는 것 같지 않는 출근길 지옥철에서나
3분에 한 번씩 지하철이 오는데도 이 번 거 놓치면 지각이라
땀 뻘뻘 흘리며 계단을 두 칸씩 성금 성금 내려올 때나
한 걸음 걸으면 노래가 바뀌는
복잡시런 번화가 거리를 걸을 때나
하루 종일 사람에게 치여 지끈 거리는 머리 붙들고
아무도 없는 밤길 걸어 집으로 향할 때면
그때 그 들기름 냄새로 가고 싶다
고작 들기름 한 병 사면서도
괜히 할매한테 흥정했다가 욕도 얻어먹고
손님이 귀찮은 듯 거친 대접받아가며 장 봐도
괜스레 기분 좋아지는 시골 시장 들기름 냄새로 가고 싶다
이런저런 고민에 머리 아파오는 오늘 같은 날이면
걱정 없이 개울가에 앉아 발도 담그고
뉘엿 뉘엿 넘어가는 붉은 하늘도 보고
바람에 실려오는 풀 눕는 소리와 꽃 피는 소리 들리는
시골 시장 골목 어디선가 풍겨오는
들기름 냄새로 훌쩍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