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내가 그 자리에 앉는 게 아니었어. 그날 마당에 빗줄기가 쏟아져 내릴 때, 토방에 쪼그리고 앉아 아무 생각 없이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기고 있을 때.
홍 서방이 아이들과 칫솔이며 라면을 사러 간다고 했었네. 그러라고 빗길에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줬는데, 마당을 나선 자동차 꽁무니가 저만치 달아나는 것을 본 순간, 나도 몰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거야.
십수 년 전 그 일이 그대로 떠올랐거든. 그날 내가 그랬어. 엄마 아버지 싸우지 마시고 잘 지내세요 또 올게요. 그때 아버지가 그러셨어.
"아 너는 내가 언제 싸운다고 그러냐. 먼 길 조심해서 잘 가거라."
운전석에 앉아 브레이크에서 천천히 발을 떼는 순간, 왼쪽 사이드미러에 엄마의 모습이 하나 가득 들어왔어.
엄마가 허공 중에 크게 두 손을 그리다가 가슴에 모아 쥐는 것을.
홍 서방 차는 이내 왼편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나는 알고 있어요. 마을 회관 앞을 지나 난간 없는 시멘트 다리를 건너면 또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날 거라고.
이랬었구나. 엄마는 이 자리에서 그랬었구나.
잠시 눈앞에서 사라졌던 홍 서방 차가 나타났지. 굽은 길을 돌아 조금 더 달리다가 내 시야에서 왼쪽 편으로 영영 사라졌을 때 나는 또 알았네.
엄마는 대문 앞을 출발한 내 차가 저렇듯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여전히 이 자리에서 가슴에 두 손을 모아 쥐고 기도를 했다는 것을.
그날은 그랬어.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그동안 고구마 줄기를 못 먹어서 한이라도 맺힌 듯, 손톱 밑이 까맣게 물이 들도록 하릴없이 고구마 줄기만 벗기고 있었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자꾸만 그 노래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거야.
아늑한 산골짝 작은 집에
아련히 등잔불 흐를 때
그리운 내 아들 돌아 올 날
늙으신 어머니 기도해
그 산골짝에 황혼질 때
밤마다 그리는 나에 집
희미한 불빛은 정답게
외로운 내 발길 비추네
엄마는 지금까지도 그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엄마의 친정집이 나의 친정집이 되었을 때부터 엄마는 그 집 자체였어.
왜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을까. 그날 아침 텃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고구마 줄기를 딸 때만 해도 몰랐었네. 느닷없이 비가 쏟아질 때도 몰랐어.
그랬었네. 그런 거였어. 홍 서방 차가 저만치 달려갈 때 서야 알았어. 내 외갓집이 친정집이 된 순간부터 엄마는 집이 된 것이었어.
8년 전 화상을 입고 3주 동안 병원에 입원했던 엄마가 퇴원을 해서 꿈에 그리던 집에 돌아왔을 때가 기억나네. 병원 침대에 누워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지내느라 그나마 남아있던 엄마의 다리 근육이 모조리 소진되어 버렸지.
엄마는 그토록 좋아하는 그 공간에 와서 하룻밤을 지내고 요양원으로 가겠다고 했어. 누운 자리에서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던 거지.
이 세상에서 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열두 자식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다치지 않게 잘 키워낸 내가 감사하다고. 호랑이가 열두 번 물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아무 문제없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다고. 거인 같던 엄마가 그토록 작아 보였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
그날 엄마가 요양원에 가기 위해 챙겨 둔 보따리를 풀어 보고 나는 울었네. 그 좋은 옷들 다 놔두고 입고 벗기 편한 옷이 달랑 두벌. 내복 두벌. 속옷 세장. 그리고 종이 기저귀 몇 개. 만 원짜리 몇 장과 동전 몇 개가 들어 있는 작은 손지갑.
이것이 진정 92년 동안 모진 세월 살아오면서 자랑스러운 열두 자식을 키워낸 엄마의 보따리여야 하는가. 내내 마음이 무거웠네.
그 후 엄마가 수원에 있는 요양원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었네. 어쩌면 엄마가 영영 엄마의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그대로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엄마는 역시 우리 열두 남매 자랑스러운 엄마였네. 본인 스스로 선택한 요양원 생활을 2개월 만에 마감을 하고엄마의 친정집, 그리고 나의 친정집으로 돌아오셨던 거야.
서울에 사는 오빠들과 가까운 요양원에 계속 머물러 줄 것을 바라는 딸들에게 모진 엄포를 쏟아부으며 쟁취한 승리.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가 한 일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일 잘 한 일인 것 같아.
보무도 당당하게 엄마의 친정집으로 돌아온 엄마. 나는 엄마를 만나러 소리 소문도 없이 달려갔었지. 엄마는 요양원으로 떠나기 전보다 훨씬 건강해졌었고, 훨씬 행복했었고, 자신감도 충만해져 있었어.
"여기가 천국이다. 이 좋은 데 놔두고 왜 내가 요양원에서 살아야 하느냐"라고 그랬지.
엄마가 너무 들떠서 깜빡 잊고 있는데, 사실 요양원 생활은 엄마 스스로가 선택했던 일이야.
눈곱만큼 주는 밥이 배가 고팠다고 했어. 여기서는 내가 먹고 싶은 때 내가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어서 좋다고.
"배가 고프면 밥을 달라고 하면 되지"하는 나에게 엄마는 그랬어.
"내가 거지냐? 열두 자식을 남부럽지 않게 키운 내가 빌어먹듯 밥 달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라고 했었지.
어쩌면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없겠다고 생각한 엄마가 집에 돌아왔어. 비록 화상을 입기 전처럼 지팡이를 짚고 이곳저곳 이동을 할 수 없었지만, 엄마는 안방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화장실로 앉아서 거동을 할 수 있었어.
요양보호사가 그러대. 엄마는 화장실 볼 일도 알아서 다 하신다고. 아침에 와서 밥하고 반찬만 만들어 드리면 된다고. 점심은 엄마가 알아서 챙겨 드시고 저녁에 잠깐 들여다본다고. 다른 어르신들에 비하면 할 일이 많지 않다고.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드시지 못하는 엄마에게 꼭 해 드리고 싶었던 무나물을 해 드렸네.
엄마가 그랬잖아. 우리 은빈이 낳고 나서 첫이레 때.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7일마다 7번씩 49일 천도재를 지내듯,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때도 7일마다 7번의 이레를 챙겨 준다고. 엄마는 우리 열두 자식을 낳을 때마다 꼭 7번의 이레를 챙겨 줬다고 했어. 그때 빠지지 않는 나물이 무나물이라고 했지.
다른 사람은 잘 모르는, 엄마만이 알고 있는 무나물의 의미는 무병장수라고 했어.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는 의미.
열두 자식을 낳고 이레가 되면 채 썰어 볶은 무나물. 새로 지은 따뜻한 밥과 미역국을 상에 차려 안방 윗목에 놓고 허공 중에 크게 원을 그려 두 손 모아 절을 하던 엄마.
그날 나도 엄마를 위해 처음으로 무나물을 볶았네. 엄마가 좋아하는 엄마의 친정집.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외갓집으로 돌아오셨으니 그 공간에서 지금보다 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고.
엄마가 그랬어. "너는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반찬이 맛나다"라고. 그게 다 엄마 등 뒤에서 엄마가 하는 것을 보고 요령껏 배운 솜씨이지 어디서 배운 거겠어.
그날 엄마와 함께 지낸 하룻밤이 마지막이었어.
설날이 오기 전에 엄마에게 가야지 했는데 가지 못했는데, 엄마는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고 그 집을 떠나버렸네. 그토록 사랑하던 그 공간을 어찌 두고 훌훌 떠나셨을꼬.
이 세상에서 엄마의 마지막 날 아침. 엄마는 요양보호사가 차려준 아침밥 맛 나게 드시고 후식도 드셨어. 평소 먹던 약도 챙겨 드셨다고 했어.
일요일인 그날, 평소처럼 원불교 교당 법회에 참석할 셋째 오빠에게 엄마는 그랬다지. 어느 때처럼 엄마의 목소리가 하늘을 나는 듯 밝았다고 했어.
"오늘 일요일인데 원불교 교당에 가서 마음공부 잘하거라."
그것이 살아생전 엄마의 마지막 말이었어.
효자인 셋째 아들과 기분 좋은 전화통화를 끝내자마자 앉은 채로 거실에서 안방 문턱을 넘다가 스르르 몸을 뒤로 누우셨다는 엄마. 한번 숨을 길게 내뱉은 후 두 번 다시 들이마시지 않았다는 엄마.
엄마와의 전화 통화가 끝난 직후, 곧장 요양보호사의 전화를 받은 셋째 오빠가 우리들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는 '엄마가 쓰러지셨음’.
그리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도착한 문자는
‘엄마가 돌아가셨음’.
지금도 그날 그 순간을 생각하면 한순간에 마음이 저려와. 아이들 방학하면 아이들과 함께 가겠다는 엄마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더 그래.
그래도 다행이야. 엄마의 마지막을 지켜 주었던 요양보호사가 빠르게 교무님께 연락을 해 주었던 것이. 곧장 달려온 교무님이 엄마의 손과 발을 주물렀을 때 손 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금세 알아차려 준 것이. 엄마의 몸을 깨끗한 이불 위에 곧게 눕히고 엄마의 귀가 닫히기 전에 열반 기도를 해 준 것이.
나는 알았네. 엄마가 서울에 사는 딸년들에게 지지 않고 싸워서 끝내 엄마의 친정집으로 와 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 잘하셨어. 나는 알아요. 엄마는 요양원에서 10년을 더 사는 것보다 단 하루를 살아도 엄마의 집에서 마음 편하게 사는 편을 선택했을 거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파란만장했던 엄마의 93년 삶을 마음 편하게 마무리하고 미련 없이 훌훌 떠날 수 있는 공간이 엄마의 집 말고 어디가 또 있을까?
엄마가 떠난 후 7년 동안 빈 집으로 남아 있는 집. 그런데 그 빈 집이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이 아니었음을 모자란 나는 이제야 알았네.
그날 그 아침. 그 자리에 앉아서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길 때. 열두 자식들이 엄마를 찾아오고 떠나갈 때마다 그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서 지켜보았다는 것을.
먼 길 돌아가는 자식들 뒤에서 허공 중에 두 손을 크게 그려 모으며 기도했다는 것을.
그대로 그 집이 된엄마.
지금도 아늑한 산골짝 작은 집에 아련히 등잔불 밝히고 우리 열두 남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