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한 약속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마음에 남는 후회..

by 한명라

사람이 평생을 살다 보면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게 된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또 헤어짐이 있기에 만남을 약속하지 않을까?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는 그만큼의 약속도 있게 된다.


만남을 위한 약속 말고도 자기 자신과의 약속도 있고, 무엇인가를 사 주기로 하는 약속, 무엇을 해 주기로 하는 약속 등 약속의 종류도 다양하다.


오늘 가 들려주고 싶은 약속에 관한 이야기는 친정아버지에게 이렇게 하지 않겠다고 나 스스로가 다짐했던 약속이지만, 결국 지키지 않아서 나 자신에게 ‘잘했다’고 고마워하는 약속이고, 또 다른 약속은 친정엄마가 나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한 약속이었지만, 지키지 못해서 두고두고 마음에 아쉬움과 후회로 남아 있는 약속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지키지 못할 약속은 절대 하지 않는 것. 만약 약속을 했다면 그 약속은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약속하기 전에 몇 번이고 심사숙고하고, 꼭 지킬 수 있다는 자신이 있을 때 약속을 한다.


2010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친정아버지를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아니 결혼을 하고 나서도 무척 미워했다.


아버지는 고향의 농협에 근무를 하셨는데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50대 초반의 나이로 정년퇴직을 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농협에 근무하는 동료에게도 그다지 신뢰를 받지 못했던 탓에 정년퇴직을 할 시기도 아니건만 등 떠밀리듯 농협을 그만두어야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하신 후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의 어린 시절은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우리 형제는 5남 7녀 열두 남매인데,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기 전, 소위 잘 나가던 시절에도 단 1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만도 못했다.


집안 살림과 자식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할머니 고모들과 엄마에게 입버릇처럼 했던 이야기가 아들, 딸 모두 초등학교만 보내고 아들들은 머슴살이를, 딸들은 식모살이를 보내라고 했다.


그랬던 탓에 아버지는 언니, 오빠들의 초등학교 육성회비나 중, 고등학교 수업료, 대학교 등록금에 대해서는 아예 무관심했다.


지금도 생각이 난다. 중학교에 다니던 언니들이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해서 아침에 등교하기 전에 아버지께 수업료를 달라고 하면, 아버지는 누가 너더러 학교에 다니라고 했냐고, 학교에 가지 말라고 큰소리로 화를 내고는 했다.


언니가 가방을 들고 대문 앞에서 서서 ‘아버지~ 수업료 주세요~’하면 기다란 장대를 휘두르며 집 밖으로 쫓아내던 아버지.


중학교에 다니던 막내 오빠가 아버지께 말대꾸라도 하면, 너는 학교에 다닐 자격도 없다고 하면서 오빠의 책가방을 집 옆의 논에 던져 버리거나, 아니면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피거나, 아니면 돼지우리에 던져 버려서 책가방 밖으로 튕겨 나온 책들이 온통 돼지 똥으로 범벅이 되기도 했다.

그 책들을 집 근처 냇가에서 흐르는 물에 씻어 햇볕에 말리면 얇은 책은 2배, 3배의 두께로 변신하기도 했고, 책을 펼치면 돼지똥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렇게 자식들에게 함부로 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세 가지 약속을 했다.


첫째, 나는 커서 돈을 벌면 절대로 아버지에게 용돈을 주지 않겠다.


둘째, 내가 자라서 결혼을 하게 되면 신부 입장을 할 때 절대로 아버지의 손을 잡지 않고 신랑, 신부 동시 입장을 하겠다.


셋째, 훗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절대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


이 세 가지 약속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확실하고 또렷해졌다. 그리고 더 굳은 다짐을 하듯 언니들과 동생 앞에서도 몇 번을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런데 나는 정작 그 3가지 약속 모두를 지키지 못했다.


첫 번째 약속은 몇 번 정도는 시도를 해서 지켰지만, 어느 순간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아버지, 자식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아버지가 안쓰러워서 용돈을 드렸다.


두 번째 약속만은 꼭 지키려고 했었지만 그 또한 지키지 못했다.

1991년 3월 9일 나의 결혼식을 앞두고 제법 진지하게 신랑에게 제의를 했다. 신랑 신부 동시 입장을 하면 어떻겠냐고. 그랬더니 이 남자는 단번에 거절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결국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해야만 했다.


마지막 세 번째 약속,

아버지께서 돌아가셔도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남편과 함께 요양원에 찾아갔었다. 혼자서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스스로 가리지 못하는 아버지는 이발을 해서 깔끔하고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침대에 누워 계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혼자 계시는 너희 시아버지께 잘해라.’ 하셨다.


그때 아버지가 당신 가슴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이 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그때 아버지의 손끝이 유난히 말랑말랑 부드러워 보이고 둥글게 보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마 위로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 내려와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아버지 이마 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부드러워 보이는 손을 잡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나에게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기에 몇 번을 망설였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내 옆에 서 있던 남편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버지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아버지 가슴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잡아 꾹꾹 눌러주고 있었다.


‘그만 가 보거라’하는 아버지의 말을 뒤로하고, 빗줄기가 떨어지는 요양원 건물 처마 밑에 서서 나는 한참을 서성였다.


그렇게 떠나 온 지 며칠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입관을 지켜보던 나는 차갑게 식어버린 아버지의 손끝이 요양원에서 마지막 보았을 때처럼 여전히 말랑말랑 부드럽게 보여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겠다는 나의 세 번째 약속도 그렇게 지키지 못했다.


훗날 셋째 언니는 나에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너는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하더니 그때 네가 제일 서럽게 울더라." 하고.


지금 생각해보 아버지를 위해서 절대로 하지 않겠다던 세 가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모질게도 그 약속을 끝끝내 지켰더라면 지금쯤 나는 두고두고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또 나의 지키지 못한 약속은 친정엄마와의 약속이다.


2012년 12월 10일은 엄마가 돌아 가시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가 뵈었던 날이다.


나는 찾아가겠다는 소식 없이 2시간 동안 자동차를 멈추지 않고 달려서 '엄마~'하고 현관문을 열고 친정집에 들어섰을 때, 반가워하던 엄마의 얼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2개월 정도 경기도 수원에 있는 요양원에서 생활을 했던 엄마는 어느 정도 자신의 몸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게 되자 친정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그때 언니와 동생은 절대 반대를 했다. 수원의 요양원에 계시면 서울에 살고 있는 아들, 딸들이 언제라도 달려와 만날 수 있는데, 자동차로 4시간 이상 걸리는 친정집과의 거리도 문제지만, 아직 몸이 불편한 엄마 혼자서 있게 할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엄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때 나는 셋째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요양원에서 10년을 사는 것보다 시골집에서 단 하루를 산다고 해도 엄마가 원하시면 엄마 뜻대로 해 드려요.”


결국 오빠들도 언니도 엄마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고 엄마는 그렇게 친정집으로 돌아오셨다.


불시에 찾아 간 나에게 엄마는 노래하듯 말씀하셨다.


“나는 여기가 천국이다. 요양원에서는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대로 못 먹어서 항상 배가 고팠다.”


“엄마~ 그러면 직원들에게 배가 고프다고 달라고 하시지 그랬어요?”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거지냐? 달라고 하게? 그 어려움 속에서 열두 자식들을 키워낸 내가 남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해야 한단 말이냐? 여기서는 내가 먹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먹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서 좋다. 나는 정말 행복하다. 이제 죽어도 원도 한도 없다.”


엄마와 하룻밤을 보내고 여러 밑반찬을 해 놓고 친정집을 떠나올 때 엄마는 나에게 당부하셨다.


“돌아오는 12월 27일에 아이들 겨울 방학도 할 텐데, 그때 아이들 데리고 한번 오너라. 그때 외할아버지 제사인데 네가 아이들 데리고 와서 제사 준비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알았어요, 그때 아이들이랑 같이 올게요.” 하고 떠나온 것이 엄마와의 마지막이었다.


엄마와 약속했던 그해 12월 27일은 눈을 구경하기 어려운 이곳 창원에도 폭설이 내려 도저히 차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마 곁에 계시는 요양보호사와 통화를 했는데, 친정 동네에는 더 많은 눈이 내렸다고, 엄마도 나에게 오지 말라고 하신다고 했다.


2013년 2월 17일 엄마께서 돌아가신 후 나는 후회를 했다.


그날 폭설로 인해서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더라도, 눈이 녹은 이후에 아이들과 함께 엄마를 찾아왔어야 했다고. 엄마와의 지키지 못한 약속은 엄마가 돌아가신 지 7년이 된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이제는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기에 더 아쉬운 것 같다.


나는 지금의 내가 참 좋다. 혹시라도 누가 나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서 ‘만약 되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때로 돌아가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절대로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러나 또다시 누가 나에게 물어본 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딱 2번 있다고.


아버지를 마지막을 찾아뵙던 그때로 돌아가서 내 손으로 직접 아버지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드리고, 유난히 손끝이 말랑말랑 부드러워 보이던 아버지의 두 손을 잡아 드리고 싶다고.


엄마와의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엄마에게 나를 낳아 주고, 이렇게 길러 주셔서 감사하다고, 엄마가 나의 엄마여서 자랑스럽고, 엄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그때로 돌아가서 이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생전의 아버지와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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