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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Aug 09. 2021

둘째 오빠는 행복을 주는 개그맨

열두 남매 중 넷째, 둘째 오빠 이야기..

열두 남매 중에서 열한째인 저는 다섯 명 언니, 다섯 명 오빠들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들은  직접 목격하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열두 자식들뒷바라지와 무남독녀인 탓에 친정의 일도 아들처럼 챙겨야 했기에 엄마는 언제나 동분서주 바빴습니다. 그런 중에도 가을걷이를 끝낸 겨울이면 따뜻한 안방 아랫목에 나란히 누워서 제가 궁금해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형제들과 떨어져서 6살까지 외갓집에서 살았던 저는 틈만 나면 외할머니에게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고는 했습니다.


그러면 외할머니께서는 "우리 강아지 옛날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면 시집을 가서 가난하게 산다는디..." 하면서 더 이상 들려줄 이야기가 없으면 "이야기가 뙈야기를 짊어지고 고개를 넘어가다가..."로 이어지는 억지로 지어 낸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외할머니를 졸라서 옛날이야기를 들었듯이 엄마 옆에 누워서 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은 둘째 오빠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동생이 태어난  외갓집에서 6살까지 외할머니 손에 자라다가 7살이 되면서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엄마, 버지, 언니, 오빠들이 사는 오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기억 속에 둘째 오빠의 첫 모습은 월남에서 군대 제대하고 돌아온 모습부터 시작됩니다.


1949년 1월생 소띠인 둘째 오빠는 남들보다 훨씬 어린 나이인 6살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무엇이 급해서 오빠를 그렇게 빨리 국민학교에 입학을 시켰는지 엄마에게 물어보았는데, 엄마는 둘째 오빠가 자꾸 공부를 하고 싶어 해서 아예 입학을 시켰다고 하더군요.


둘째 오빠가 태어나서 17개월 정도 지난 1950년에 6.25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엄마가 피난을 안 간 것인지, 미처 못 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엄마는 둘째 오빠와 마루에 앉아서 삶은 고구마를 먹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둘째 오빠가 무엇인가를 엄마에게 요구를 했는데 엄마께서 들어주지 않자 오빠는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서 토방으로 내려가서 신발을 신고, 다시 몇 개의 돌계단을 이용해서 마당에 내려가더니 신발을 한쪽에 가지런히 벗어 놓고는 마당 한가운데서 마구 뒹굴면서 떼를 쓰기 시작하였답니다.


한참을 그렇게 뒹굴고 있을 때 엄마께서 마당으로 내려가서

"우리 착한 아들이 왜 이리 화가 났을까, 엄마가 잘못했네..." 하고 이야기하자마자, 오빠는 떼를 쓰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오빠의 트레이드마크인 장난기 섞인 웃음을 '씩~' 웃더니 다시 신발을 신고 옷에 묻은 흙들을 툭툭 털어 내고는 마루로 올라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고구마를 먹었다고 합니다.


6살에 국민학교에 입학을 한 오빠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에 진학하여 전주까지 기차 통학을 했습니다. 둘째 오빠는 동기생들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나이로 공부를 따라가면서 피곤도 했겠지요. 어느 날인가 둘째 오빠는 학교를 마친 후 기차를 타고 오수의 집으로 오는데 그만 기차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서 내려야 할 '오수역'을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둘째 오빠가 집에 돌아 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오빠를 기다리다가 엄마는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는데, 오빠가 잠을 자느라 남원까지 가서 지금 남원역에 있다는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역무원이 남원역에서 둘째 오빠를 다시 기차에 태워 보냈고 엄마오수역으로 마중을 나가는, 그런 난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둘째 오빠는 교사가 되기 위해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에 진학을 했고, 그 후 전주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72년쯤이던가? 큰오빠는 서독에 광부로 가 있고 둘째 오빠는 월남에서 군대생활을 하고 있을 때, 둘째 오빠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한 장의 사진도 들어 있었습니다.


아주 몸매가 날씬어느 팔등신 아가씨 옆에 흐뭇하게 웃는 둘째 오빠의 모습이었습니다.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두 사람의 어깨너머로 같은 부대의 전우들이 아주 부러운  둘째 오빠를 쳐다보는 사진.


그 팔등신 미녀는 그때 당시 미스코리아로 선발된 후, 월남의 오빠가 근무하는 부대에 위문공연차 들렀다가 오빠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 사진의 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사진을 둘째 오빠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사진 속의 둘째 오빠의 장난스러운 표정과 팔등신 미녀의 모습만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데 엄마는 그 사진을 보면서 단박에 걱정부터 하십니다.


자세히 보니 오빠의 한쪽 발은 군화를 신었는데 한쪽 발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마도 빨리 사진을 찍으려는 급한 마음에 군화를 제대로 신을 시간이 없었을 거라고 엄마를 위로를 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알고 보니 그때 오빠의 발 부상을 당해서 심하게 부어 올라 군화를 신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부상당한 발을 가지고도 남보다 빠른 행동으로 팔등신 미녀와 사진을 찍고야 만 둘째 오빠의 정신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월남에서의 군대생활은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정글에서 언제 어느 때베트콩과 마주칠지 모르는 일이 많았고, 사실 몇 번 마주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럴 때면 서로가 씩 웃고 그냥 지나쳤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등골이 서늘했을까요?




저 어렸을 때에 둘째 오빠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눈앞에 닥쳐도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행여나 동생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둘째 오빠는 그 특유의 눈웃음과 재치 있는 말솜씨로 우리들이 한바탕 신나는 웃음과 함께 조금 전의 걱정은 훌훌 털어 버릴 수 있게 했습니다.


둘째 오빠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고, 세상은 희망과 행복이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둘째 오빠는 우리의 희망이 되기도 했고 언제나 어려움을 의논할 수 있는 상대가 기꺼이 되어 주었습니다.


둘째 오빠의 국민학교 친구였던 호떡장수 친구가 언제인가 저에게 둘째 오빠에 대해서 들려주었던 말입니다.


"오빠는 절대로 친구들 사이에서 허점을 보이지 않는, 냉정할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한번 마음을 주고 정을 나눈 사람은 그 사람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더라도 절대 신뢰하고, 그 사람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서라도 도움을 준다"고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들에게 항상 좌절 대신 희망을 갖게 하던 둘째 오빠의 또 다른 일면을 보게 된 것만 같았습니다.


2000년, 열두 남매가 모두 결혼을 하고 안양에서 엄마 아버지 두 분만 살고 계실 때였습니다. 엄마는 여전히 시간만 나면 산서면 오산리에 있는 외갓집을 잊지 못하고 먼 길을 오고 가면서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때 둘째 오빠는 낡은 외갓집을 허물고 새집으로 신축하여 두 분을 그곳에서 살 수 있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여러 형제들은 엄마의 간절한 소망임을 알면서도 많은 반대를 했습니다.

 

나이 80이 넘은 두 분들. 먼 곳에 살고 계셔도 자식이 사는 곳으로 모셔 오거나 가까운 곳에서 사시도록 해야 하는데, 왜 가까운 데(안양)에 사시는 분들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게 해야 하느냐고요.


1995년도 외갓집 풍경


그때 당시 엄마는 몸이 아픈 제가 걱정이 되어서 창원의 우리 집에 며칠 동안 와 계셨는데, 저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온 형제들은 정작 몸이 아픈 저의 안부보다는 외갓집을 새로 짓는 것을 반대하느라 바빴습니다.


물론 저도 반대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고요.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을 한 남편의 의견에 저는 둘째 오빠의 찬성 쪽에 서게 되었습니다.


'장모님의 평생소원이 헌 집을 새로 신축하는 것인데, 자식들이 무작정 반대만 해서 되겠냐고요. 무엇보다도 장모님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않냐고요.'


우리 열두 남매 중 둘째 오빠가 새집을 신축하는 일을 자청해서 떠맡았지만, 누구 한 사람 둘째 오빠에게 잘한다고, 잘했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빠는 많은 형제들에게 비난의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외갓집을 신축하였고, 그렇게 오랫동안 엄마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누구보다도 큰언니의 반대가 가장 컸는데, 그 후 여름휴가 때 큰언니가 친정집에 다녀온 이후로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보다 엄마, 아버지께서 만족하고 잘 지내시니 마음이 놓인다"라고 했답니다.

"다만 몸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고요.


외갓집을 신축하는 동안에 주말이나 주중에도 외갓집을 못 잊어서 밤길에 속도를 내어 달려가느라고 범칙금도 두 번이나 냈다는 둘째 오빠. 고속도로를 운전을 하며 달려오다가도 고향을 표시하는 지명을 발견하면 두 팔을 벌려 좋아한다는 둘째 오빠.


늙으신 부모님 새집에 이사하신 후, 자신의 사무실 일은 내팽개쳐 두고 찾아와 몇 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오빠 혼자서 하수도 공사, 장독대 공사, 그리고 수돗가 주변 공사, 확독을 인체공학적으로 계산하여서 허리와 엉덩이를 돌리기에 딱 좋은 높이로 맞추어 놓았다는 둘째 오빠의 허풍 섞인 너스레는 언제 들어도 행복한 웃음을 짓게 합니다.

 

저는 물론이고 열두째 막내까지 관심과 사랑을 아끼지 않는, 지금도 우리 형제들에게 밝은 희망과 기쁨을 선물하고 있는 둘째 오빠입니다.


저의 부족한 글솜씨로 모두 소개할 수 없음이 아쉬움으로 남을 뿐입니다.


  

밝은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는 둘째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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