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버지와 혼인을 하고 손 위 시누이(나의 서울 고모)의 며느리를 통해서 원불교라는 종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혼인을 하기 전에는 아들을 낳고자 백일기도를 하는 외할머니를 따라 집 근처의 절을 다니기도 했을 것입니다.
엄마는 원불교를 통해서 많은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여자교무도 남자 교무와 동등하게 신도들 앞에서 설교도 하고, 원불교 살림도 책임지고 이끌어간다는 사실과 자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공부도 할 수 있겠다는 사실에 엄마는 원불교 교무 선생님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사물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도 원불교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어쩌면 엄마는 당신이 아직 혼인을 하지 않고 원불교라는 종교를 알았더라면, 원불교 교무 선생님이 되어서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하고, 자기 혼자만의 삶을 위하기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도움을 주는 삶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1970년 후반 고등학교에 다니던 저에게 "너는 결혼을 하지 말고 원광대학교 교학과에 진학하여 원불교 전무 출신을 하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엄마가 꿈꾸었던 삶을 제가 대신 살아가기를 바랐던지도 모릅니다.
저의 다섯 오빠들의 종교는 모두 다릅니다.
큰오빠는 성당을 다니고 있고, 둘째 오빠는 분당의 교회에 수석장로라는 직책으로 다니고 있고, 셋째 오빠는 원불교를 다니고 있고, 넷째 오빠는 성당을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막내 오빠는 특별한 종교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들들과 며느리들에게 단 한 번도 엄마의 종교를 강요하거나 바랬던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2008년 2월까지는 다섯 아들 중에서 원불교에 다니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2008년 2월 21일, 법대에 다니면서 고시공부를 준비하던 셋째 오빠의 아들인 승엽이가 26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까지 특별한 종교가 없었던 셋째 오빠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들의 장례를 치른 후, 셋째 언니가 다니고 있는 원불교 교당에서 승엽이의 49 천도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셋째 오빠는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원불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26살 젊은 아들을 떠나보내고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아픔을 셋째 오빠는 종교의 힘으로 이겨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엄마는 다섯 명의 아들 중에서 엄마처럼 원불교를 다니는 아들이 없었는데, 2008년부터 셋째 오빠가 원불교를 다니게 되자 은근히 기분 좋아했습니다.
셋째 오빠는 승엽이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남은 장례식 비용을 아들의 친구에게 장학금으로 지급했다고 합니다.
몇 년이 지나서 우연한 기회에 제가 셋째 오빠에게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그 내용은,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고 남은 돈을 의미 없이 쓰기보다는 뜻있게 사용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승엽이가 세상을 떠나기 이전부터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공부를 하는데 많이 힘들어하는 친구의 사정을 안타까워했다는 것을 기억했고, 그 친구에게 망설임 없이 장학금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후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매달 일정한 금액을 아들 친구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하였고, 그 친구는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하여 지금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셋째 오빠와 승엽이가 이루지 못한 사법시험 합격에 대한 꿈을 아들의 친구가 대신 이룰 수 있어서 마음 뿌듯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0년 6월 14일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혼자 계시는 엄마가 걱정이 되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아침이면 9시를 전후하여 안부전화를 하는 것도 셋째 오빠였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매일 아침이면 "우리 효자 아들의 전화를 받아야지~"하고 셋째 오빠의 전화를 받기 위해서 거실에 있는 전화기 근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2013년 2월 17일 아침 8시 30분쯤, 엄마의 93년 삶을 마무리는 하는 순간도 셋째 아들과의 전화통화를 끝내는 순간이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이었던 그날, 어느 날처럼 변함없이 걸려 온 전화로 셋째 아들의 목소리를 확인한 엄마는 "오늘 일요일인데 교당에 나가냐? 교당에 가서 마음공부 잘하고 오너라"가 엄마의 마지막 말이자, 유언이었습니다.
셋째 오빠와의 전화통화를 마치고, 앉은 채로 거실에서 안방 방문을 넘어가다가 갑자기 몸이 뒤로 넘어갔다는 엄마. 그때 엄마와 셋째 오빠와의 전화 통화를 지켜보던 요양보호사가 뒤에서 엄마를 가슴으로 안았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엄마는 숨을 길게 내쉬고는 다시는 숨을 들이마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요양보호사는 곧장 셋째 오빠에게 "지금 어머니가 이상하다고, 숨을 쉬지 않는다"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렇게 93년 동안 이어졌던 엄마의 삶을 마무리한 후, 우리 열두 남매는 엄마의 49 천도재를 지냈고, 엄마가 돌아가신 후 맞이하는 첫 번째 생일 법회도 지냈고, 돌아가신 후 100일 되는 날 백일기도도 지냈습니다.
이제 자식으로서 돌아가신 엄마를 위해서 더 이상 해 드릴 것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셋째 올케언니를 통해서 셋째 오빠가 매일 새벽마다 돌아가신 엄마를 위해서 천일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매일 이른 새벽마다 100일 기도를 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1년 365일 기도를 하는 것도 어려울 텐데 1,000일 기도라니...
저는 아예 생각도 못했고, 꿈도 꾸지 못하는데 우리 형제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가신 엄마를 위해 1,000일 기도를 시작하고, 또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는 셋째 오빠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2015년 11월 25일,
셋째 오빠는 가족 카페의 게시판에 '지난 13일(2015년 11월 13일인 금요일)은 어머님 열반하신 지 1.000일 되는 날이었습니다.'라는 글과 셋째 오빠 가족의 근황을 소개하였습니다.
셋째 오빠는 그 말 이외에는, 그동안 돌아가신 엄마를 위한 1,000일 기도를 드렸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셋째 올케언니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저는 셋째 오빠가 돌아가신 엄마를 위한 1,000일 기도를 무사히 끝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 형제 중에서는 셋째 오빠가 엄마를 위해 1,000일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형제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애써 생색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끝까지 실천하는 셋째 오빠의 꾸준함과 실천하는 힘을 저는 닮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