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명라 Aug 07. 2021

아들의 서울대학교 입학원서를 찢어 버린 엄마

우리 집의 다섯째, 셋째 오빠 이야기..

그동안 저의 글을 읽어 온 독자님들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저의 친정 형제들은 열두 남매입니다.


무남독녀 엄마가 18살 나이에 1살 아래인 아버지에게 시집을 와서 20살 나이에 첫 딸을 낳고,

생기는 대로 낳다 보니 5남 7녀 열두 남매가 되었습니다.


굳이 순서를 알려드린다면 '딸, 아들, 딸, 아들, 아들, 아들, 딸, 딸, 딸, 아들, 딸, 딸'입니다.

저는 그중에서 11째입니다.

오늘은 저의 셋째 오빠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셋째 오빠는 제가 여러 차례 소개 한, 바로 아랫 동생인 넷째 오빠와는 외모도 성격도 완전히 다른 오빠입니다.

셋째 오빠를 보면 '내유외강'이라는 단어가 떠 오르는, 유머도 없고 말수도 적어서 과묵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려서 어린 시절의 저는 셋째 오빠에게 말 한마디 붙이기 힘들 만큼 어려운 오빠였습니다.


그 셋째 오빠가 5살 정도의 어린 시절, 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던 그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엄마는 추석을 며칠 앞두고 장을 보러 간다고 집을 나서면서 셋째 오빠의 신발도 사 오겠다고 약속을 했답니다.
그때 우리 고향은 5일마다(5일, 10일, 15일...) 장이 섰는데 근처 고장에서는 규모가 큰 장이었지요.

셋째 오빠는 엄마가 신발을 사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왜 이리 오지 않는지 조바심을 내다가 더 이상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지 못하고 장터로 엄마를 찾아 나서기로 마음을 먹고는 대문을 나섰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어리기에 방향 감각이 부족했던 셋째 오빠는 장터와는 전혀 반대방향인 남원으로 가는 신작로를 따라 무작정 앞으로 앞으로만 걸어갔다고 합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한참 뒤에야 셋째 오빠의 부재를 알게 되었고, 가족 모두 셋째 오빠를 찾아 동네 구석구석 찾아다녔고, 급기야 장터까지 찾아갔다고 합니다.

온 가족들이 자기를 애타게 찾는지도 모르는 셋째 오빠는 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따라 몇 시간 동안 자박자박 걸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엄마를 잘 아시는 이웃동네 아저씨께서 소달구지를 타고 남원 방면에서 오다가 셋째 오빠를 발견하였고, 또 엄마의 아들이다는 것도 한눈에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빠를 보고 "지금 어디를 가느냐?'라고 묻자, 셋째 오빠는 "엄마를 찾아서 장에 간다"라고 했답니다.


그 아저씨는 오빠를 번쩍 안아 자신의 소달구지에 태우고 우리 집까지 태워 주었다고 합니다.

고마운 아저씨가 셋째 오빠를 우리 집에 데려다 주기 전까지는 온 가족들이 셋째 오빠를 영영 못 찾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태산이었다고, 오랫동안 우리 가족들에게 두고 두고 웃음 섞인 이야기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포장이 되어있지만, 셋째 오빠는 엄마를 찾아 이 길을 걸어 갔습니다.  




그리고 셋째 오빠와 관련된 다른 이야기 하나..

그 당시 아버지는 우리 고향에서 번화가라 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은 농협에 근무를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엄마가 정성껏 싸 주는 도시락을 가지고 출근을 하였는데, 어느 날 도시락을 깜박 잊고 그냥 출근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셋째 오빠에게 농협으로 아버지 도시락을 가져다주고 오라는 심부름을 보냈답니다.

셋째 오빠가 도시락을 가지고 농협에 도착을 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점 식사를 했다고 그냥 집으로 가져가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셋째 오빠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농협의 창문 아래 길거리에서 도시락을 펼쳐 놓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 에도 아버지의 밥상에 놓인 밥과 반찬은 우리들 밥상에 놓인 반찬과는 분명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면 아버지 밥상에 놓인 반찬을 서로 먹으려고 했지요. 하물며 사무실에서 드시는 도시락이니 그 반찬은 엄마의 정성이 얼마다 더 들어갔을까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셋째 오빠는 농협 건물 바로 아래에서 도시락을 펼쳐 놓고 홀라당 먹어버린 것이지요.
그때 아버지와 같이 농협에 근무를 하고 있는 아저씨께서 그 모습을 보고 셋째 오빠에게 빵 하나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 아저씨도 그렇지 이왕 빵을 주려면 우리 형제들이 몇 명인데 달랑 빵 하나만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셋째 오빠는 아버지의 도시락도 다 먹어서 배도 부르겠다 그 맛있는 빵을 형과 동생, 그리고 누나들에게 자랑하고 싶었겠지요.

집으로 그 빵을 가지고 왔더니, 큰오빠, 둘째 오빠, 넷째 오빠, 그리고 언니들이 "나 한입만, 나 쪼끔만..."하고 셋째 오빠에게 달려들었나 봅니다.

그 순간 셋째 오빠는 달랑 하나뿐인 빵을 여러 사람들과 나눠 먹으려니 자신에게 할당될 양이 너무 적을 것 은 생각에 작은 방에 숨어 혼자서 그 빵을 다 먹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셋째 오빠의 별명은 다른 오빠들과 언니들에게 '돼지''밥통'이었습니다.

뭐든지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 '돼지'와 밥이 하나 가득한 '밥통'

아버지의 도시락을 다 먹은 상태에서도 빵 하나를 통째로 다 먹었다는 이유로 그 일이 있은 후로 언니, 오빠들은 셋째 오빠를 오랫동안 돼지와 밥통으로 불렀습니다.


셋째 오빠가 도시락을 까 먹었을, 고향의 농협이 있는 풍경




셋째 오빠는 원리원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모습 때문에 고지식해 보일 정도로 올곧게 살아가는 오빠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셋째 오빠가 사법시험에 합격을 해서 판사를 하면 아주 잘 했을 거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어린 제 앞에서 여러 번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셋째 오빠가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해서 너희 아버지가 자식들 교육에 조금만 신경을 쓰고, 가정에도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셋째 오빠의 삶이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요.


셋째 오빠가 전주에 있는 북중학교와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대에 진학하기 위해서 서울대학교 입학원서를 사 가지고 왔는데, 엄마는 그 자리에서 셋째 오빠의 서울대학 입학원서를 찢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만약 네가 큰 형처럼 서울대학교에 합격하지 못하고 떨어지기라도 하면, 네 밑으로 동생들이 줄줄이 많아서 재수를 시킬 수도 없고, 그러면 너도 큰형처럼 아예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합격할 수 있는 대학교에 입학원서를 써넣거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셋째 오빠는 전북대학교 법대 진학하였고 졸업했습니다.


저는 잘 알지 못하고 셋째 언니를 통해서 전해 들어서 알지만, 셋째 오빠는 전북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 준비를 1년 정도 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계속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오랜동안 공무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그런 셋째 오빠가 무뚝뚝한 모습으로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지만, 마음으로는 항상 동생들 생각도 많이 하고, 엄마의 걱정도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언제인가 셋째 올케언니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저는 과묵하기만 한 줄 알았던 셋째 오빠의 남 모르는 속 깊은 사랑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뒷줄 오른쪽 첫번째가 전북대학교 법대를 다니던 때의 셋째 오빠, 바로 옆에는 넷째 오빠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에 대한 기억 2가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