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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Aug 06. 2021

아버지에 대한 기억 2가지..

넷째 오빠가 들려 준, 내가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저는 지금의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번 이렇게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 자신이 확실하다고 알고 있던 것들, 그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확실하게 믿을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인지요.


그날 그 자리에서 똑같은 상황을 겪었지만, 훗날 시간이 흘러서 그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서 이야기하다 보면 그날 상황에 대해서 서로가 전혀 다르게 기억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겪고도 사람에 따라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받아 들기도 하듯이 그 기억조차 사람에 따라서 좋은 기억, 혹은 아주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국민학교 4학년 이후, 아버지께서 농협을 정년퇴직을 한 이후로 엄마와 4명의 언니, 막내 오빠에게 행사했던 무자비한 폭력과 폭언들로 인하여 제가 부정적으로 기억하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넷째 오빠는 아버지를 무척 긍정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오빠와의 대화 속에서 여러 차례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가족 카페에 남겨져 있는 넷째 오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 두 가지.


제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어서 저는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한 것 같아서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 첫 번째 기억 -  보물찾기


요즈음 세대의 초등학교 입학 전 아동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글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에 깨운 친 것 뿐만 아니라, 영어까지 쓰고 간단한 영어회화도 구사합니다. TV 시청과 어린이 프로의 영화 연속극을 시청하여 사회에 대한 인식도 어느 정도 정립이 되어있습니다. 유아들이 전기 충전된 장난감 자동차를 운전하기도 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뮤지컬 맘마미아를 관람했는 데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아동의 관람료가 14만 원 하는 VIP석에서 뮤지컬을 관람하는 것을 보면서 요즘 아이들은 경제적 풍요로움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의 국민학교 입학 전 생활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국민학교 입학하기 이전의 해이니 1960년도 생활입니다.

고향집 남신동 골목에서 접어서 만든 딱지치기, 자치기, 삐뚤어진 구슬치기, 대나무 구부려 만든 활쏘기, 겨울에는 나무판자로 짜 맞춘 스케이트 타기 등이 나의 하루 일과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한글은 국민학교에 입학해서야 ㄱ, ㄴ, ㄷ부터 배우고 교과서를 베껴가는 숙제를 하면서 여름방학이 되어서야 깨우쳤습니다. 요즈음 초등학생들과 비교하면 창피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TV 시청도 없었고 한글을 모르니, 친구들과 어울리고 윗사람의 언행을 보고 들으면서 사회생활을 익히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비교하기 시작하는 시기로 기억됩니다.


어느 여름날, 아버지의 요구로 도시락과 맛보지 못한 과자와 음료수를 준비해서 고향집 옆을 흐르는 커다란 냇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합수정(정자. 두 갈래로 흐르던 시냇물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을 지나 덤바위 부근 밤나무골로 가족 소풍을 갔었습니다.


집에서 준비를 해 간 음식을 먹은 후, 아버지는 갑자기 형들과 나에게 보물찾기 시간이라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보물 찾기가 무엇인지 몰라서 멍하니 서 있는 데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데리고 가더니 돌멩이를 들춰 보라고 하셨습니다. 돌멩이 밑에는 쪽지가 접혀 있어서 집어 들었는데, 그 종이가 연필과 노트가 적힌 보물 쪽지라고 하면서 연필과 노트를 상품으로 주셨습니다.


가족 소풍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용정리 방향의 철길이 굽어지는 근처에 있는 원두막에서 수박과 참외까지 사주셨습니다.


가족 소풍 후 한동안 아버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 평소에 아버지께서 말씀이 없어 몰랐는데 깔끔하고 기분을 내어 베풀 줄 아는 멋쟁이셨고, 국민학교 입학을 앞둔 나에게 보물 찾기로 노트와 연필을 선물하신 것을 보고 정이 많으시고, 나를 많이 사랑해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는 생각은 성년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2016.5.26. 아버지 기일을 앞두고...)






*  두 번째 기억 - 바둑


2016년 3월, 세계적으로 엄청난 관심을 끈 바둑 대국이 있었습니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프로와 세기의 대국이었습니다. 대국 결과 이세돌 선수가 1승 4패로 패배했습니다.


바둑 최고수 인간 이세돌이 인간이 길들인 인공지능 컴퓨터에 패한 결과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고, 지금도 인공지능 컴퓨터 개발 붐을 일으키는 산업의 변화는 계속됩니다. 논란의 초점은 인간이 인공지능 로봇의 노예가 되는 게 아닌지, 또 로봇의 등장으로 일자리를 잃는 게 아닌가 였습니다.


대국이 중계되는  동안 이세돌 프로의 모친이 이세돌이 초등학교 시절 일반 학원에 보내지 않고 바둑만 가르쳤는데 학업성적이나 생활이 다른 학생에 비하여 월등히 뛰어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세기의 대국 후 바둑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서 유치원에서 바둑을 배우는 유소년의 모습이 TV 화면에 보이기도 합니다.


외국인이 한국인에 대한 성격과 특성을 대표하는 단어가 "빨리, 빨리"입니다. 외국인에 비친 한국인의 특성은 계산과 의사결정이 무척 빠르게 보이고 늦어지면 빨리, 빨리를 외쳐 독촉하는 모습을 보아 온 결과라 생각합니다.


내가 성인이 되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국민학생 시절 특별활동시간에 주산반에 들어 암산을 배운 것이 계산을 신속히 하고, 후에 산수와 수학에 흥미를 갖게 하고 학교 성적의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어릴 때 바둑을 두어본 것이 논리적 사고에 도움을 주고, 여러 경우의 수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습관이 길러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로 기억이 납니다.


"바둑을 두려거든 형제간에 사이좋게 둘 일이지 싸우려고 바둑을 두냐?"는 어머니의 큰소리와 함께 남신동 집 마루에서 마당으로 어머니가 바둑판을 던져버려서 바둑판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깨어진 바둑판을 살펴 보았는데 기타 줄 같은 줄이 여러 줄 붙어 있었습니다. 바둑돌을 놓을 때 안에서 공명으로 좋은 소리가 나게 하는 줄입니다.


이어서 흰색 바둑돌들과 까만 바둑돌들이 마당 이리저리 흩어집니다. 흰색 바둑돌은 하얀 조개껍데기를 갈아서 공들여 만들어졌고, 까만 바둑돌은 조금씩 비뚤어졌지만 옥돌을 공들여 갈아서 만든 돌입니다.


바둑판과 바둑돌을 보았을 때 그때 당시에 보기 드문 상당히 고급스럽고 부티나는 바둑판과 돌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바둑판과 돌을 준비하여서 큰형부터 둘째 형, 셋째 형까지 바둑을 가리켰고 넷째인 나는 형들 어깨너머로 배웠지만 서열에 밀려 많이 두지는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바둑판을 마당에 내던져서 사형선고를 하시게 된 사유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중 둘이서 바둑을 두다가 "한 번만 물려달라", "못 물려준다"라고 서로 옥신각신하면서 큰소리가 오고 가는 상황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서 보다 못한 결론이었습니다.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렸을 때, 우리들을 위해서 귀하고 고급스러운 바둑판과 알을 구해서 형들에게 바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이후에 다섯 아들 모두에게 바둑 실력은 뒤졌지만, 아들들이 바둑을 두고 있으면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한 마디씩 거들고는 하셨습니다.


부자 지간, 모자 지간에 거리는 있었지만, 그래도 자식에 대한 아버님과 어머님의 마음속 깊은 뜨거운 사랑이

있었다고 나는 느꼈습니다.


(2016. 7. 8. 점심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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