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받고 싶었던 엄마의 신년 복돈

2008년 2월 27일, 엄마에게 받았던 신년 복돈

by 한명라

언제부터인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저의 지갑 한편에는 엄마가 저에게 준 신년 복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결혼을 한 이후, 설날이 지난 후에야 뒤늦게 친정집을 찾아가서 세배를 하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엄마는 세뱃돈을 주셨습니다.


외손녀, 외손자, 사위, 딸 모두에게 주었던 엄마의 세뱃돈.


'아니라고, 우리는 주지 않아도 된다'라고 손사래를 치는 저에게 엄마는 "이 돈은 복을 주는 복돈이다"라고 기어코 딸과 사위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엄마에게 받은 신년 복돈은 만 원짜리 지폐 2장 또는 3장쯤이었습니다. 저는 그 돈은 아무렇지 않게 쉽게 쓸 수가 없어서 절반은 접고, 또 절반을 접어서 저의 지갑 한편에 고이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 설날이 되어 엄마로부터 새로운 신년 복돈을 받으면 새로 받는 복돈은 저의 지갑에 넣어져서 1년 동안 보관을 하고, 1년 전에 받은 복돈은 초파일 날 우리 가족들을 위한 일 년 등을 켤 때 연등 비로 쓰였습니다.




2008년 2월 21일 목요일 저녁, 셋째 오빠의 아들 승엽이가 26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세상에 와서 정확하게 25년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승엽이.


2003년 12월 승엽이에게 진단되었던 병명은 '골육종'이었습니다. 그때 한쪽 어깨뼈가 골육종으로 녹아버렸기에 인공뼈로 교체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던 승엽이.


큰 수술을 마치고 병마와 싸우면서도 고시 공부를 했던 승엽이는 암투병으로 인해 휴학을 하느라 2008년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법대생이었습니다. 자식 앞세운 부모는 장례식장에 오는 것이 아니라고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만류를 했지만, 셋째 오빠와 올케언니는 의연하게 그 슬픔을 이겨내고 장례식장에서 모든 절차를 지켜보았습니다.


승엽이가 세상을 떠난 다음날인 2월 22일에는 지난밤 꿈자리가 안 좋아서 불안하다며 엄마는 이곳저곳 전화를 해서는 승엽이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88살의 엄마가 손주를 앞세워 보내고 충격을 받을까 모두들 아무 일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월 23일 토요일, 저는 벽제 승화장에서 화구로 들어가는 승엽이를 보면서 가족들이 승엽이를 화장을 하면서 떠나보내듯이 엄마 또한 손주를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모두들 한결같은 마음으로 승엽이를 떠나보냈는데 손주의 죽음을 알지 못한 엄마는 매일 새벽 일찍 목욕재계하시고 손주의 빠른 회복을 기원하는 긴긴 기도를 하실 것이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엄마도 승엽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저의 이야기를 듣고 셋째 언니가 엄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건강은 괜찮으신지, 점심 진지는 드셨는지 여쭙고 사실은 2월 21일에 승엽이가 세상을 떠났고, 지금 화장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차마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언니를 보면서 지켜보던 모든 가족들도 눈물 흘려야 했습니다.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탄식이 섞인 엄마의 목소리는 그동안 아픈 손주를 위해 밤낮없이 노심초사 마음 졸이시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벽제 승화원에서 승엽이는 한 줌의 재로 남았습니다. 유리창을 통해 1시간 30여 분 만에 마주한 승엽이의 유골에서 뜨거운 고열에도 차마 녹여내지 못한 쇳덩어리의 인공뼈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인공뼈를 보면서 셋째 언니와 올케언니는 탄식처럼 "저걸 보니 우리 승엽이가 맞네... 저 쇳덩이를 몸속에 담고 살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고..." 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49일 동안 7차례에 걸쳐 원불교 교당에서 천도재를 지내고 있는데 2월 27일 수요일,

2번째 천도재를 앞두고 전라북도 산서면 오산리에 살고 계시던 엄마께서 앞서 떠나 버린 손주의 천도재 참석하고자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30년 가까이 신경통으로 고생하신 까닭에 지팡이 없이는 잘 걷지도 못하는 엄마께서 택시와 버스, 그리고 기차를 갈아타면서 서울로 오셨습니다.

연로하신 엄마께서 손주의 마음 아픈 소식을 알게 되면 충격을 받을까 봐 며칠 동안 승엽이 소식을 숨기다가

벽제 승화원에서 화장을 하는 도중에 소식을 전해야 했기에 손주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엄마는 뒤늦게라도 손주의 천도재에 참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엄마의 그 마음을 알기에 불편한 몸으로 먼 길을 찾아오시는 엄마를 자식들을 차마 말리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 7시 30분에 시작한 천도재에서 엄마가 혼잣말로 되뇌었던 말 때문에 천도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눈물바다를 이루고 말았다고 합니다.


88세의 할머니가 26살의 젊은 손주의 영정 사진 앞에 절을 하면서


"그려 기어이 갔냐? 그동안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더냐? 이제 어서 건강한 몸으로 다시 오너라~"




그날 승엽이 2번째 천도재를 마치고 엄마는 평소 궁금했던 곳들을 셋째 언니의 도움을 받아 바쁘게 찾아다녔습니다.


마포에서 동생과 제가 함께 운영하고 있는 영어학원에도 다녀 가셨고, 저녁 9시가 넘어야 퇴근을 하는 저의 집에는 저는 집에 없었지만 언니와 함께 들러서 저의 아들만 만나고 가셨습니다.


불편한 다리로 학원으로 찾아온 엄마의 얼굴을 볼 수밖에 없었던 나. 저도 없는 우리 집을 다녀가신 후 바쁘다는 이유로 엄마께 따뜻한 밥도 지어드리지 못해 마음 한편이 시리기만 한 저에게 며칠 후 동생은 노란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엄마께서 저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그 봉투에는 '한명라 신년 복돈'이라고 삐뚤 삐뚤 연필로 쓰여 있었고, 봉투 속에는 만 원짜리 지폐 4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돈을 받으면서 또 저는 울컥 눈물이 솟구치는 듯했습니다.


자식에게 복을 준다는 엄마의 신년 복돈. 다음 해도, 그리고 그 다음 해에도 오래도록 계속 받고 싶은 것은 저의 지나친 욕심이었까요? 지금은 엄마의 신년 복돈을 받고 싶어도 더 이상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더 이상 엄마의 신년 복돈을 받을 수 없다고 해도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8년 2월 27일, 88살 엄마에게 받았던 신년 복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