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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May 18. 2021

딸과 관람했던 '화려한 휴가'

1980년 나는 2007년 고1 딸과 동갑이었습니다.

                                                                                                                                                                                                                                                                                                                                                                                                                                                                                    

2007년 7월, 전남 담양에 있는 한빛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딸아이가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서울 마포에 있는 우리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엄마~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하면 저랑 함께 보러 가야 해요~"하고 저의 대답도 필요 없다는 듯 강제로 약속을 잡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되기도 전에 딸아이가 손꼽아 기다린 이유는 딸아이가  담양에 있는 한빛고등학교에 입학한 것과는 전혀 무관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2007년 8월 3일 오후, 저는 딸아이와 모처럼 다정하게 외출하여 신촌에 있는 극장에서 화려한 휴가를 관람했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지극히 평범하기만 한 시민들이 삶을 살아가느라 이리저리 몸을 부딪치면서 보여주는 여러 형태의 상황과 에피소드를 보여주면서 시작되었고 상당한 시간 동안 관객들의 웃음을 터트리게 했습니다.


또 택시기사로 살아가면서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가장이기도 한 남자 주인공이 마음속으로 사랑하게 된 여인에게 다가가기 위해 동료기사에게서 조언을 구하고, 실천하는 장면에서 벌어지는 실수 연발들이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던 그 당시 저는 전북 오수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시청하던 채널이었던 광주 mbc 방송이 갑자기 중단되고 있었지만, 평소처럼 대학생들의 데모쯤으로 여기고 있던 저에게 짝꿍인 영미가 조심스럽게 들려주던 이야기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게 했습니다.


"있잖아 명라야~ 우리 옆집 할머니 아들이 광주에서 경찰로 근무하고 있어서, 그 집 손자도 광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며칠 전부터 여기 와 있는 것 있지? 방학도 아닌데 학교도 안 가고... 아마 지금 광주에서는 무슨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설악산으로 가는 수학여행을 행여 못 가면 어쩔까 하여 걱정만 늘어놓던 우리들은, 광주에서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 같다는 추측만 조심스럽게 소리 낮춰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고3이 되던 1981년, 우리 학교에 지리 선생님 한분이 새로 오셨습니다.


그해 전남대학교를 졸업했다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 선생님을 보면서 우리는 또 소리 낮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쩌면 저 선생님이 지난해 광주에서 그 어떤 일인가를 겪었을 것이고, 또 우리에게 그 이야기해 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1981년 5월 18일, 그날 공교롭게도 우리 반에 지리수업이 있었습니다.


그날 선생님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교단에 서서 우리들이 내내 궁금해했던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조심스럽게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은 광주에 있어서 죄인이라고... 대학 4학년이던 그때, 많은 대학생들이 전두환 물러가라고 데모를 할 때

자신도 그 자리에 함께 했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계엄군이 광주에 파견되고, 당시 군인이었던 외삼촌이 광주에서의 위급함을 깨달았기에 대학생 데모대 명단 끄트머리에 합류하고 있는 자신을 납치하다시피 집으로 데려와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마치 유흥업소에서 종사하고 있는 여자처럼 화장도 진하게 시켜서 강제로 서울에 있는 친척집으로 피신을 시켜버렸다고 했습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자신은 광주에서 처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그 순간에 서울에 있었고, 많은 선배와 후배, 그리고 친구들을 그때 잃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학교가 정상화되었을 때, 돌아오지 못한 많은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 앞에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중,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창가로 가서 운동장을 바라보던 선생님의 작은 어깨의 흔들림은 지금도 저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있습니다.


그 후 1982년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저는, 해마다 5월이 되면 숨조차 쉴 수 없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 더욱 치열해지는 대학생들의 데모와 캠퍼스 여기저기에 전시되었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주에서 처참하게 숨진 희생자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면서, 제게 있어 광주는 언제라도 꼭 찾아가고 싶은, 찾아가야 하는 그런 고장이 되어버렸습니다.


2006년 11월, 딸아이가 한빛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30여분이 넘는 면접을 보고 나와서는 울상을 지었습니다.


"엄마, 나 한빛고등학교에 떨어질 것 같아요.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고 질문을 는데, 저 제대로 대답을 못했거든요."


그런 딸아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딸은 거짓말처럼 한빛고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2007년 5월 18일을 하루 앞둔 5월 17일에는 전교생이 담양 한빛고등학교에서 광주 5.18 민주화 묘역까지 도보로 걸어서 갔다고 합니다.


몇 시간을 걸어서 광주까지 가는 동안 날씨는 덥고 발도 아파서 너무나 힘들었다는 딸아이는 그때 행사에 참여하게 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보다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학교에서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자신이 시민군 역할을 맡았었다면서 그런 일련의 행사에 참여하면서, 어쩌면 영영 알지 못하고 지나갔을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바쳐서라도 지켜주고 싶었던 소중한 사람들도 모두 떠나보내고,  어둔 밤거리와 허공 중으로 "사랑하는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화려한 휴가'에 등장했던 많은 사람들이 결혼식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에서, 그 처참했던 싸움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밝게 웃는데, 혼자 살아남은 여주인공의 모습이 유독 슬프게 그려진 것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인 것인지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 각자가 마음으로 느껴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딸아이는 너무나 슬퍼서,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저에게 영화'화려한 휴가'를 함께 봐야 한다고 강요했던 딸아이에게 언젠가는 5.18 민주화 묘역을 이 엄마와 함께 가자고 이야기를 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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