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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May 12. 2021

고향의 '기바우 아저씨'

50여년전, 성난 황소처럼 고향집 골목을 내달리던 기바우 아저씨

제가 태어나고 자라던 우리 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지어서 살던 적산가옥으로,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까지 농협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거주하는 관사였습니다. 그 집은 쌍둥이 집이었습니다. 남쪽을 바라보면 앞편에 위치한 우리 집과 뒷집은 그 크기나 구조가 모두 똑같았습니다.


해방 이후 아버지께서 그 집을 구입을 해서 우리 집이 되었는데, 살아오면서 우리 집과 뒷집은 각자가 편리한 대로 외부 모습이 조금씩 변경되었지만, 그 기본 구조는 여전히 우리 집과 뒷집은 쌍둥이집 자체였습니다.


유난히 창문도 많았고, 요즘의 붙박이 장과 같은 용도의 다락도 안방에 두 개나 있어서 안방에는 따로 장롱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안방과 작은 방 사이에 커다란 대청마루가 있어서 그 대청마루에 장롱 두 개와 뒤주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지요.


화장실은 옛날 시골집들은 대부분이 변소, 또는 '칫간'이라고 하여 대부분 안채에서 멀리 떨어진 대문 옆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우리 집은 안방에서 뒷마루를 통하여 실내에 연결되어 있어서 신발을 신지 않고도 맨발로 드나들 수 있어서 간혹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기라도 하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집안을 이리저리 구경하고는 했습니다.


집안 구석구에는 숨을 곳도 많아서 막내 오빠와 저, 그리고 동생은 뒷마루와 대청마루에서 곧잘 숨바꼭질을 하며 놀곤 했습니다.


그 집 앞 마루에 서서 보면, 저만치 멀리 남쪽으로 기찻길이 들판을 가로질러 길게 누워 있고요, 우리 집에서 그 기찻길을 향해서 커다란 냇물에서 갈라져 나온 봇도랑을 옆에 끼고 200여 미터쯤 걸어가다 보면 고향에서 하나뿐인 도살장이 있었습니다. 그 도살장은 제법 규모가 컸습니다.


도살장에는 여러 명의 아저씨들이 큰 돼지들을 짐발이 자전거 뒤에 싣고 부지런히 드나들며 잡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가끔 커다란 누런 황소도 그 도살장에 끌고 와서 잡고는 했지요.


추석, 또는 설날이 다가오면 그 도살장 굴뚝에는 유난히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피어올랐고, 돼지들의 비명소리끊임없이 울려 퍼지곤 했습니다. 그 부산함이 주변을 감싸고도는 분위기 자체만으로도 명절이 다가왔음이 느껴지고는 했지요.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끌려가기 싫어서 억지로 끌려가던 황소가 어떨 때에는 밧줄을 끊고 도망을 쳐서 온 동네를 어수선하게 뒤죽박죽 만들어서 유명한 동네의 개구쟁이들 조차 행여 성난 황소의 뿔에라도 받치게 될까 봐 몸을 사리게 하는 공포의 도가니로 빠지게 했지요.


그 도살장 옆의 창고와 나란히 연결되어 있는 단칸방에는 어느 일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집의 자녀들은 저보다 나이가 위인 아들, 딸들이 있었고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와 비슷한 나이의 딸도 있었지요.


그 아이의 이름이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저와 함께 국민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그 집의 자녀들은 국민학교 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대처로 돈벌이하러 나가야 했고, 그 집 아주머니는 도살장에서 나오는 고기의 내장이 부산물들을 푹 삶아서 커다란 다라(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제법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동네까지 팔러 다니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저씨가 계셨는데, 그 아저씨는 동네의 모든 사람들, 특히 개구쟁이들이 '기바우'라고 부르는 아주 특이한 별명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 아저씨가 하는 일은 생산적인 일, 특별한 일이라고는 거의 하나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 도살장을 깨끗하게 정리 정돈하는 일,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노란 양은 주전자를 들고 도살장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두 군데의 주조장을 번갈아 가며 막걸리를 받으러 가는 일이었습니다.


얼굴에는 희로애락을 나타내는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 없었고, 동네의 그 많은 사람들과도 눈인사나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던 , 기바우 아저씨는 술을 받아 오는 길에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술이라도 몇 모금 마셨는지 기분 좋게 취했을 때면 이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길가의 풀에게도 술 한 모금 먹으라며 부어 주기도 했고, 흘러가는 봇도랑의 물에게도 술 한 모금 마시라고 찔끔 따라 주기도 했습니다.


오로지 하루에도 몇 번씩 술을 받으러 다니는 행위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아주 소중한 의미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 없는가를 찾아서 두리번거리던 동네의 개구쟁이들이 마침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해서 지나가는 기바우 아저씨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아저씨에게 "기바우는 기발고, 하바우는 하발난다"하고 놀리기도 했지만 기바우 아저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이들이 놀리는 소리는 아예 듣지도 못한 듯 무시해 버리고 술 주전자만을 소중한 보물단지라도 챙기듯 손잡이를 꼭 잡고서 도살장을 향해서 걸어가고는 했습니다.


그러던 기바우 아저씨가 어느 날, 마치 아주 온순한 황소가 죽음의 문턱에서 밧줄을 끊고 도살장을 탈출하여 우리 동네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듯이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기다란 장대를 들고는 너무도 철딱서니 없이 자신을 놀리며 돌을 던지던 개구쟁이들을 쫓아 골목길을 달음박질을 하던 모습을 저는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처, 자식 보다도 막걸리만을 좋아하고, 그 막걸리를 받으러 가고 받아 오는 것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낙인 것처럼 보이던, 동네 사람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않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온순한 기바우 아저씨의 분노는 가히 온 동네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고, 오래도록 마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그 어떤 개구쟁이도 감히 기바우 아저씨를 예전처럼 놀리려고 하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에게도 술 한 모금을 권하고, 봇도랑을 흘러가는 시냇물에게도 술 한 모금을 권하고, 길가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에게도, 풀 한 포기에도 마음 좋게 술 한 모금을 권하던 기바우 아저씨가 성난 황소처럼 폭발을 하여 온 동네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내달리던 모습이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가는 저에게 가끔씩 생각이 나곤 했습니다.


세상이 내게 부당하게 굴어도 하고 싶은 말 다 하지 못하고 오늘을 아가 있는 적지 않은 사람. 그 부당함을 애써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 부당함의 도가 지나치면 언제라도 용기 있게 떨치고 일어나서 나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음을 주장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그래야 더 이상 터무니없이 억울하게 짓밟히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50년전 고향의 '기바우 아저씨'가 성난 황소처럼 골목길을 내달리던 모습은 지금까지 제가 적지않은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이따금씩 조근조근 이야기하고 합니다.


왼쪽, 맨 앞에 보이는 건물이 기바우 아저씨가 살던 도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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