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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미숙 Jun 06. 2020

갱엿

혼신의 맛, 갱엿

   

  우리 식구가 더운 여름이면 찾아가는 냉면집이 있다. 나름 이름 난 곳으로 여름이면 발 디딜 틈 없는 맛 집이다. 시원한 얼음 닭 육수에 말아 주는 메밀면을 주욱 들이키면 간담까지 서늘해진다. 그 냉면집 문 앞에는 늘 자리 잡고 있는 엿장수가 있다. 밀반죽 같은 널따란 엿을 조각칼로 쪼개어 판다. 냉면으로 더위가 가신 몸에 후식으로 엿을 먹으면 절세 궁합이 따로 없다.

   

나는 엿을 좋아한다. 아마도 소싯적 맛보았던 달콤한 추억 때문 일 것이다. 우리 가족은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해 변두리 판자촌에 산 적이 있다. 판잣집 동네는 이 소리 저 소리 온갖 삶의 소리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이곳저곳을 다니던 고물 엿장수 아저씨의 가위 소리는 판자촌 아이들이 유독 반기는 소리다. 커다란 가위를 쩔그렁쩔그렁 거리며 오는 날이면 으레 껏 동네 아이들은 놀다가도 얼른 집으로 들어가 뭐 고물 될 만한 거 없나 집안을 뒤진다. 술잘 먹는 아버지를 둔 아이들은 술병을, 양은 냄비를 새로 장만한 집 아이들은 구겨진 낡은 양은 냄비를, 연탄집게가 망가진 집 아이들은 연탄집게를, 온갖 엿 바꿔먹을 고물을 집에서 뒤져 나온다. 개중에는 멀쩡한 냄비를 일부러 두들겨 구겨서 고물로 만들어 가지고 나오기도 했다. 그 어떤 애가 바로 우리 오빠다. 이도 저도 별수 없이 빈손인 애들은 엿가락을 손에 든 애들을 입에 침을 가득 담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어야 했다.

  

언제부턴가 우리 동네 판잣집 근처에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이 생겼다. 동네 아이들은 쓰레기가 나날이 쌓여 산이 되어 가는 쓰레기 산에서 고물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로지 허연 엿가락을 사 먹고 싶어서였다. 고물을 모아둔 동네 애들은 엿장수 가위소리를 귀에 담고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엿 거래 가격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2홉들이 소주병 두 개에 엿 한가락을 바꾸어 주었다면, 쓰레기 산이 생기면서는 소주병 다섯 개에 엿 한가락이었다. 아주 그냥 엿장수 맘대로였다. 아무튼 엿장수 아저씨가 오는 날이면 동네 아이들의 입은 달콤해져 거친 말도 거친 욕도 입에 담지 않는다.

  

그보다 좀 더 어릴 적 시골 살 때, 어머니가 고아 만든 갱엿의 맛은 판잣집 동네에서 먹던 엿가락 맛에 비할 바 아니다. 빈한한 살림살이에 해마 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밑에 어머니는 커다란 가마솥에 엿을 고았다. 엿을 고느라 꼭두새벽부터 아궁이에 불을 땠으므로 나란히 붙어 있던 윗방과 아랫방 바닥이 절절 끓었다. 그날, 우리 식구들은 아랫방보다 덜 끓는 윗방에 몰려서 자야만 했다.

  

우리 집 엿의 재료는 엿기름과 옥수수다. 꽁보리밥을 먹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쌀로 엿을 만든다는 엄두도 못 냈다. 여름에 따두었던 실한 옥수수를 툇마루에 매달아 말린다. 바짝 마른 옥수수를 씻어서 푹푹 삶는다. 잘 삶아진 옥수수를 채에 받쳐 건진 다음 엿기름과 물을 넣고 오랜 시간 삭힌다. 삭힌 재료를 광목 보자기에 싸서 맷돌을 얹어 꼭 짠다. 보자기의 찌꺼기는 버리고 짠 엿물을 가마솥에 붓고 고기 시작한다. 이때 커다란 나무주걱으로 쉬지 않고 지어줘야 하는 일과 아궁이 불 조절하는 일이 중요하다. 엿물이 묽을 때 하는 주걱 질은 수월하지만 엿물이 꾸덕꾸덕해지면 팔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힘이 들다.


내가 이토록 엿 고았던 일에 대해 기억을 잘할 수 있는 이유는 ‘살림밑천’으로 태어난 맏딸이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남의 집 김매러 가는 날은 막내둥이를 업고 있었고, 집안의 소소한 일거리가 늘 손에 쥐어졌다. 엿 고는 날이면 나무주걱 질이 나한테 주어진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커다란 주걱을 쥐고 너른 가마솥 둘레를 돌려 젓는 일은 참으로 고되다. 잠시 한눈을 팔면 불을 때고 있던 어머니가 눌어붙는다고 부지런히 저어야 한다고 경을 친다. 그래서 엿 고는 일이 참으로 고되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어머니만 하랴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머니는 오래도록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4남매의 간식을 위하여 밤늦도록 부뚜막을 떠나지 않고 가마솥의 엿물이 더 이상 저어 지지 않을 때까지 졸린 눈을 비벼가며 엿을 만들었다. 뜨거운 방바닥에서 자는 바람에 온 몸이 지져진 상태로 아침에 눈을 뜨면, 둥그렇게 모양을 갖춘 갱엿이 콩가루로 단장을 하고 툇마루에 널려져 있었다. 우리 자식들은 식전이라 침을 흘리며 새벽녘에 잠이 든 어머니의 엿 맛보기 허락을 기다린다.    

  

 우리 집은 동네 맨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집 옆쪽으로 동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소벌퉁이'가 있었다. 언제 이승을 떠난 사람의 산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돌보는 손길 하나 없는 데다 아이들 뛰어놀아 벌거숭이가 되는 바람에 ‘산소벌퉁이’라 했다. 산소벌퉁이에서 내려다보면, 누구네 집 굴뚝에 연기가 나는지 안 나는지도 한눈에 볼 수 있다. 설 준비를 할 때면, 이 집 저 집 굴뚝에서 경쟁적으로 연기를 뿜어댄다. 그럴라치면 연기가 나는 집보다 안 나는 집이 더 눈에 띈다. 광식이네 집이 그랬다. 광식이 엄마는 과부였고 ‘식’ 자로 끝나는 고만고만한 아들이 여섯이나 되었다. 어머니는 콩가루 듬뿍 묻힌 갱엿을 둥그런 소쿠리에 담아 보자기로 싸고는 내 손에 쥐어 주며 광식이네 갖다 주라고 했다. 심부름을 다녀온 다음에야 우리 자식들은 뚝뚝 깬 갱엿 맛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갱엿을 널따란 광주리에 담아 오빠와 나의 손이 닿지 않는 벽장에 차곡차곡 쟁여 둔다. 엄마가 부재중인 날에는 하염없이 벽장을 쳐다보기만 한다. 그러다가 먹고 싶은 욕망이 치올라오면 오빠와 나는 벽장에 오를 공모를 꾸민다. 벽장에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다. 윗방 장롱에서 베개를 꺼내다가 층층이 쌓고는 베개가 쓰러지지 않게 내가 잡는다. 그러면 오빠가 벽장으로 올라간다. 바로 밑의 어린 동생은 엄마가 오나 안 오나 싸리문을 쳐다보며 망을 본다. 두 번째 방법은 오빠가 말 모양으로 엎드리면 내가 등을 밟고 올라간다. 후자의 방법은 오빠가 별로 선호하지 않았으므로 베개의 역할이 컸다. 양심만큼만 엿을 집어 들고 벽장에서 내려온다. 우리는 손에 넣은 갱엿을 장독대 옆 너른 돌멩이에 올려놓고 돌로 깬다. 오빠는 조각난 엿을 공평하지 않게(?) 나이순으로 나누어 준다. 그렇게 해서 입으로 들어온 갱엿은 혀와 이빨 사이에서 달콤한 맛을 내며 우리의 혼을 다스린다. 어머니가 돌아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뗐지만, 엿이 풍기는 냄새로 어머니는 알아챘을 것이다. 어머니 마음은 “어차피 자식 먹이려고 만든 엿이니 어찌 먹으면 어떠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기억에 대한 팩트체크를 위해 망각이 일상인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엄마, 옛날 시골에 살 때 설날이면 엄마가 엿을 만들었던 거 기억나요? 밤새도록 불을 때서 엿을 고았잖아요?” 그랬더니 엄마는,

“내가 언제? 그런 적 없는데!”

라고 예상했던 답변을 한다.

  

엄마의 인생 기억이 부서지는 파편처럼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 어릴 적 어머니가 고아준 갱엿 맛의 기억은

반백을 훌쩍 넘어선 나의 혀와 가슴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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