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다 있소' 사회(2)
한국전쟁이 끝난지 채 2년도 안된 1955년, 5월 16일자 「조선일보」에 “梨大에 제적사태, 邪敎徒라고 교수학생 17명 처분”이라는 기사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른바, ‘이대 사건’ 혹은 '통일교 사건'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화여대에서 학생과 교수 17명이 제적, 파면되었다. 이유는 기독교 정신에 반하는 사이비 신앙(사교) 활동을 학교 내에서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총장이었던 김활란이 직접 집행했다. 단순히 이단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내린 조치는 아니었다. 여기서 사이비 신앙이란, 통일교를 말한다. 교주 문선명이 음행이 신앙이라고 하면서 여신도들을 농락한 사건이었다. 당시 신문을 통하여 사건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세속 통일교주 문선명에 관해서는 梨大에서 교원 및 14명 학생추방사건으로 그 이름이 드러났었거니와 4일 치안국에서는 드디어 문교주를 구속하고 신앙으로 유인한 부녀자 능욕과 연령인상으로 병역을 기피한 사실에 관한 심문을 진행하고 있다. 문은 그 주위의 인간들을 광신적으로 끌어들이는 변재와 매력을 구비한 듯하며 기독교리의 임의 해석과 탄생에 의한 재림설을 주장하면서 교주와의 性交를 구세주탄생을 위한 것처럼 정신이상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하나, 우리는 교리의 異論여부 문제보다도 사회통념으로 생각할 수 없는 性的해석과 양심마비의 음행을 태연히 행하고 있는데에 문제의 초점을 두는 것이다.(조선일보 1955년 5월 16일 자)
문 자신은 거처를 숨기고 행색을 감추며 간혹 설교 정도로 신도를 대할 뿐 邪敎의 전형적 行套(행투)다. 밤이면 유부녀 기타와 더불어 여관으로 전전동숙하여 세월을 보냈으면서도 “신앙을 위하여 동지애에서 행동 통일을 하였다.”고 남녀 함께 뻔뻔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교회문 밖에는 문의 妻 및 권속이 들어가지 못하고 노상에 쭈그러 앉았는가 하면, 그 문안에는 梨大에서 추방된 족속들이 농성하고 있는 기현상이다.(1955년 7월 11일자 「경향신문」)
기독교리의 임의 해석과 탄생에 의한 재림설을 주장하면서 교주와의 性交를 구세주탄생을 위한 것처럼 정신이상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밤이면 유부녀 기타와 더불어 여관으로 전전동숙하면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앙을 위하여 동지애에서 행동 통일을 하였다.”고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당시 언론들은 문선명이 “신앙을 내세워 부녀자를 유인했다”, “성적 행위(피가름 복귀론 등)을 교리의 일부로 삼았다”라고 일제히 비판적 보도를 내놓았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사회적으로 풍기 문란을 일으킨 ‘이대 사건’(「동아일보」 7월 10일자) 이라고 특필했다.
경향신문은 1955년 7월 7일자에서 “노정되는 통일교의 정체, 괴상망칙한 교리, 교주에게 짓밟힌 유부녀도 다수”라는 제목으로, 당시 통일교의 교리 설교방식, 엽색행위, 재정, 조직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보도를 냈다.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교리설교 방식= 동교에서는 72시간(만 3일간)에 걸쳐 새로 가입한 교인들에게 “인생의 고통은 성문제의 해결로서 해결된다”는 것을 교리로 삼고 성행위를 주장한다. 설교는 교주 문씨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것으로 매주 월요일 상오 열시부터 목요일 상오 열시까지 계속된다.
만약 설교도중 문씨의 교리설교에 의아심을 가지게 되어 퇴장을 원하는 신도가 있으면 교주 문씨는 엄숙한 어조로 “퇴장하면 죽습니다”라고 말하며 퇴장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엽색행위= 문씨는 능변가로서 독실한 신도라고 지목되는 여자들이 발견되면 자기거처(동협회내 단간방)이외의 장소로 유인하여 정조를 유린해 오던 것이다.
피해자로 단정할 수 있는 4명의 여자는 30대를 넘은 중년유부녀들로서 그들의 가정은 중류이상에 속하고 있다.
그중의 한사람인 김순창(金順昌)=36, 여사는 남부럽지 않은 상류 가정의 주부였었으나 문교주의 제물이 된 후부터는 남편의 버림을 받는 운명에 놓이게 되엇다.
동협회재정관계= 현재의 헙회 건물은 세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250명의 신자로부터 성금을 받으나 그 금액은 적은 것이기 때문에 시내의 풍경을 촬영한 ‘푸로마이드’를 대량 만들어 도처에서 판매하고 있다.
조직상황= 부산, 대구 등지에 지부가 있고 서울 내에 본부를 두고 있는데 신자 수는 각각 250명정도로 도합 700여명에 달하고 있다. 이를 성별로 보면 남녀 반반씩으로 교육정도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다고 한다.
한편, 당국에서는 어디까지나 동협회의 교리에 관해서는 노-텃치 할 방침 하에 문교주를 취조중이다.
당시 통일교에 심취한 이화여대의 여성신도의 인터뷰 내용 빌자면,
교직원 한충화라는 여성은
“목숨을 걸고 주님(구세주)이 오심을 믿으며 참다운 진리를 깨달은 이상 오로지 전도하는 일 밖에는 생각이 없습니다. 퇴직쯤은 문제가 아니지요. 예수님도 그 당시 박해를 받았으니까요”
라며, 자신의 퇴직 처분을 예수님의 박해에 비했으며,
학생 박영숙은
“저는 선주태생으로 원래 기독교신자가 아닙니다. 독서를 좋아하며 진리를 찾기를 좋아하는 저는 여기서만이 참다운 진리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학교는 계속하여 다니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못이 있습니까, 신앙은 자유가 아닙니까, 헌법이 보장하지 않았어요?”(1955년 5월 16일 자, 「조선일보」)
라며 헌법에 보장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결국 문선명은 이 사건을 계기로 체포되었다. 1955년 7월 4일, 당시 내무부 치안국은 문선명과 몇몇 통일교 간부들이 체포하여 병역법 위반, 징발 특별조치령 위반, 불법감금, 공문서 위조, 국가보안법 위반 및 성적 스캔들 관련 혐의로 조사를 진행했다.(「조선일보」 1955년 7월 6일 자)
수사상 나타난 교주 문씨와 여신자와의 간통사건이 7건이나 되었다.(「동아일보」 1955년 7월 14일 자) 그러나 실제로 성추문 관련 혐의는 피해자 및 남편들의 고소가 없어 불기소되었고, 36세이면서 43세라고 속여 병역을 회피했다는 병역 위반이라는 죄목으로만 기소되어(「동아일보」 1955년 7월 6일자) 3개월의 감옥생활을 했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경향신문 1955년 10월 5일자) 당시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통일교 사건’이라 칭했고, 통일교에서는 훗날, ‘7.4사건’이라고 명명했다.
문선명이 체포된 후 언론에서는 “줄어만 가는 신도 운명의 기로에선 통일교, 그 후 눈물의 기도 소리 처량”이라는 제목으로 교세가 줄어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통일교 서울 교회당의 위치는 을지로 6가에서 장충동공원 가는 길 왼편 언덕 위에 문화주택이 즐비한 사이에 위치한 양옥집이었다.
“외관상으로는 아름다운 문화주택인 이 교회에 발을 들여 놓으니, 다다미 8조첩 가량되는 예배당에 여자가 대여섯명 남자 다섯명이 멋대로 무릎을 끓고 엎디어 울면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는데, 그 음성은 구슬프게 천정에 부딪칠 따름이었다.”(「경향신문」, 1955년 8월 14일 자)
당시 언론은 통일교의 교세가 주춤한듯 하다고 보도하였으나 그렇지 않았다. 문선명이 석방된 이후, 이를 계기로 국내외적으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여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1957년에는 전국 1백 16개 지방도시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1958년에는 일본으로, 1959년에는 미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문선명은 1965년 1월부터 10개월간에 걸쳐 세계 40개국을 순방했고, 1972년 미국으로 건너가 선교활동을 지휘하였다. 일본과 미국에서 세력을 키운 통일교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세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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