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중략)...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 특별 연성소 지도원 양성 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 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년 12월 25일 자)
일제 말기인 1943년 말, 이화여전 교장이었던 김활란이 제자들을 향해 ‘황국 여성’으로서 황국(일본제국)을 위해서 결전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이화여전을 ‘여자 특별 연성소 지도원 양성 기관’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해 하고 있다.
일제시기, 친일 행위를 했던 엘리트 여성들은 종교계, 교육계, 문인계를 망라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개신교계 인사로 총장, 학장 혹은 이사장을 역임한 인물 중에 친일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 인물로 이화여대 총장을 지냈던 김활란을 들 수 있다.
김활란은 1899년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7년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한 후 잠시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5년까지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과 보스턴 대학원에서 석사를 한 후, 콜럼비아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이화여대의 초대 총장까지 지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불과 3~4년 만에 이 과정을 마쳤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그랬다고 한다.
김활란과 개신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개신교 여성으로서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1920년에 ‘이화전도대’를 조직, 전국을 다니며 순회전도를 했으며, 기독교대한감리회 전도국 회장을 지냈다. 1921년 9월에는 정동교회 부인들을 모아 보호녀회를 조직했다. 1922년 YWCA 창립에 참여했으며 오랫동안 간부로 지냈다.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는, 각종 언론을 통하여 ‘신여성 문화운동’을 이끌고 나갔다. 여권신장을 위하여 왕성한 강연 활동을 벌였는데, 대략적인 강연 내용을 보면, “조선여자의 과거와 현재”, “여권문제에서 살길을 찾자”, “남녀 교제에 대하여”, “사람은 평등” 등이다.
1927년에는 한국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여성민족운동 단체인 ‘근우회’ 창립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같은 해 7월 15일부터 29일까지 열린 ‘태평양회의’ 제2차 회합에도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1930년대에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여성농민 교육을 위한 ‘농촌부녀지도자 양성소’를 건립하여 강사로 활동했다.
김활란은 한국 최초 여성 대학 졸업자이자 이화여자대학교 최초의 한국인 총장이었다. 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일제시기 여성교육의 선구자로서, 외교 활동가로서 맹활약을 벌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명사였다. 그에 걸맞게 생존에 교육부문 대한민국장, 필리핀 막사이사이상 공익부문상, 미국 감리교회의 다락방상 등을 수상했다. 사후에는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대한민국 최고 외교 공로자 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훈장이 무색하게, 김활란은 일제 말기 독립운동과는 무관한 적극적인 친일 행보를 보였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1937년부터 총독부에서 주관하는 각종 단체인 방송선전협의회, 조선부인연구회, 애국금채회 등의 간사로, 더 나아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사), 임전대책협의회,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임전보구단 등 일제의 정책을 선전하고 수행하는 관변단체의 임원으로 친일 활동을 했다.
대표적인 예로, 1937년 8월 20일, 김활란이 창립준비위원으로 결성한 ‘애국금채회’ 결성식의 장면을 당시 신문을 통해서 살펴보자.
“즉석에서 금채(금비녀) 13개를 헌납 금일 애국금채회 결성
그동안 준비를 거듭 하야 내려오든 시국부인단체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발회식은 20일 오전 10시 45분부터 경성여자고보 강당에서 소기(小磯)군 사령관 부인 총독부각국장 부인 이하 조선부인 800명이 참집하야 성대히 열렸다.
식은 김활란 여사의 개회사를 비롯하야 황거요배(皇居遙拜)로 국가합창 후 윤덕영 자작부인 김복수 여사가 좌장이 되어 다음과 같은 취지 선언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취지서와 선언은 다음과 같다.
취지서 동아의 풍운이 북지에 일어나서 우리나라의 군인은 당당히 불법 불의의 완만한 무리를 징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실로 나라의 비상한 때입니다. 남자는 의의 칼을 두루며 신성한 전장에 서고 있습니다. 우리 부녀자는 아모리 섬약한 몸이라 할지라도 안한하게 이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겠습니까, 이때를 당하야, 유리들 조선 여성은 분기하야 서로 의논하고 ‘애국금채회’를 조직하야 내선일체로 피차의 힘을 합하야 황군의 행동을 도와서 國恩의 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할까 하오니, 섬약한 우리들의 지극정성이 황군의 행동을 도움에 조금이라도 유조하게 되면 만행일까 하나이다. 장안장 외의 우리 여성은 다투어 찬성 하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소화12년 8월 ‘애국금채회’(「조선일보」 1937년 8월 21일 자)
1938년 11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40명의 연사를 동원하여 전국순회강연단을 꾸렸다. 강연 주제는 “시국의 재인식과 생활의 쇄신으로 장기 건설에 매진하는 각오를 보급 철저히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김활란 역시 40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남으로 향했다.(동아일보 1938년 11월 1일자) 당시 신문은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김활란의 강연에 대하여 “열변을 동하여 일반 청중 500여명에게 많은 각성을 일으켰다”라고 보도했다.(「조선일보」 1938년 11월 12일자)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시체제의 형성에 따라 「외국인의 입국, 체재 급 퇴거에 관한 건(법령)」(1939), 「기독교에 대한 지도방침」(1940), 「외국인관계 취인 · 취체 규칙」(1941) 등을 통해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들에 대한 통제와 단속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39년 4월, 이화전문의 교장이었던 아펜젤라가 사의를 표하자, 친일의 행보를 이어가던 김활란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에도 이화전문교장으로서 친일 강연활동과 교육을 지속하였다.
김활란은 ‘아마기 가츠란(天城活蘭)’이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을 했다. 그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군 징병을 칭송했을 뿐 아니라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에 협조하며 선동했다. 또한,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여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았고, 일본 내 여성단체와 조선 YWCA 통합 등 일제 정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자, 마치 독립의 열망이 남다르지 않았던 듯이, 김활란은 발 빠르게 스텐스를 바꿔 나갔다. 학생들을 동원하여 연합군의 노고를 위로하는 환영 학예회를 여는 한편,(조선일보 1945년 11월 30일자) “급속한 독립을 우방에 주장”하고자 하는 ‘대한국민총회’ 발기인에 합류했다.(동아일보 1945년 12월 8일자) 뿐만 아니라, 김구 선생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인물들이 거행한 “순국열사 추모회”의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조선일보 1945년 12월 21일 자)
더 놀라운 사실은, 일제를 위하여 ‘애국금채회’를 결성했던 그녀가 다른 친일파들과 함께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애국금을 모금하는 운동인 “애국금 헌성회(愛國金献誠會)”에 선전부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동아일보 1945년 12월 26일 자)
8.15 해방 이후, 김활란의 삶은 일제 말기 친일 행적을 지우고도 남을 만큼, 친미 반공 정치권력과 밀착, 명성에 걸맞게 세상을 누리다가 1970년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규정되어 있다.
친일파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를 강정숙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8.15 이후 다양한 정치세력이 등장하였고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일제하에서의 행위에 대한 공과를 논하게 되었지요. 그러자 이미 자기 지위를 유지하고자 갖은 노력을 하던 친일 세력들은 더욱 긴밀히 결속을 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치적인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이런 점들과 손발이 딱 맞았던 것이 이승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일파에게는 이승만의 명성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역사비평사(1993), 192)
앞서 언급했듯이 김활란은 개신교인이었다. 1899년 2월 27일에 인천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우월(又月)이었고, 기해년에 태어났다고 하여 어릴 때 이름은 '김기득(金己得)'이었다고 한다.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7세 때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았는데, 그때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학교에 다니면서 ‘헬렌’을 한자식 이름인 ‘활란’으로 바꿨다고 한다. 세례명을 이름으로 할 만큼 그의 개신교에 대한 열망은 남달랐던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