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 자살했다”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전성천(1)

by 황미숙

2022년, MBC는 윤석열이 미국 순방 당시 바이든을 향해 비속어를 썼다는 보도를 한 바 있다. 보도 이후, 대통령실과 여권은 MBC가 동맹 훼손과 허위 보도를 했다며 강하게 비난했고, 국민의힘은 MBC와 기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으며 대통령실은 해외 순방 대통령 전용기에서 MBC 취재진 탑승을 배제했다. 이를 두고 주요 언론단체들이 “헌정사상 유례없는 특정 언론사 배제 조치”라며 언론자유 침해로 규정했다.


1959년 이승만 정권 당시에는 「경향신문」을 폐간하는 사건이 있었다. 「경향신문」이 폐간된 사건은 한국 언론의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필화사건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승만 정권의 공보실장이었던 “신문계의 염라대왕” 전성천(全聖天)이 직접 타살에 버금가는 폐간 조치를 했으면서도 “신문이 자살했다”라고 한 것으로 유명하다.


「경향신문」은 가톨릭이 1927년 4월 1일에 창간한 신문이다. 이승만 정권이 「경향신문」을 폐간한 이유는, 1959년 84세의 노구임에도 이승만이 또다시 대통령에 출마의 뜻을 밝히자, 「경향신문」이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심기가 거슬렸던 이승만 정부는 1959년 1월부터 4월까지의 기사에서 여러 가지 꼬투리를 잡아 폐간 조치의 빌미로 삼았다.


◦1959년 1월 11일 자 사설인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 상”에서,

스코필드 박사와 이기붕 국회의장 간의 면담 사실을 날조, 허위사실을 보도했다고...

◦2월 4일 자 단평 ‘여적’(餘適)이 폭력을 선동했다고...

◦2월 15일 자 홍촌 모 사단장의 휘발유 부정 처분 기사가 허위사실이었다고...

◦4월 3일 자에 보도된 공산간첩 하모씨의 체포 기사가 공범자의 도주를 도왔다고...

◦4월 15일 자 이승만의 회견 기사인 ‘교안법 개정도 반대’가 허위기사라고...


특히, 1959년 2월 4일 자, ‘여적 칼럼’은 “다수결의 원칙’과 공명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선거가 다수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 결국 혁명·폭력적 봉기로 표출될 수 있다”라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를 “선거제 부정 및 폭동·내란 선동”으로 규정했다. 결국, ‘여적 필화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눈에 가시같던 「경향신문」에 대해 압수수색을 하는 한편, 관계자들을 기소했다. 그러나 이에도 분에 차지 않았던 듯, 1959년 4월 30일 밤 10시,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해 신문의 죽음을 의미하는 폐간 명령을 내렸다.


「경향신문」 폐간 조치에 대하여 당시 「가톨릭 時報」는 “한국에서 둘째가는 대신문의 지위를 차지해온 가톨릭의 일간지는 지령 제 4324호를 마지막으로 뜻하지 못한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가톨릭時報」 1959년 6월 10일자 1면 사설 중에서)

「동아일보」도 1959년 5월 1일 자에서도, “30일 밤 돌연 「경향신문」에 대하여 공보실 당국이 ‘폐간’ 조치를 취하자 각계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있으며, 폐간은 가혹하다는 게 한결같은 비난”이라고 보도하였다.


「경향신문」은 이후 폐‧정간 상태로 있다가, 4.19 혁명이 끝난 직후인 1960년 4월 30일, 361일 만에 복간되었다. 복간 두 돌을 맞이한 「경향신문」은 1962년 4월 26일 자에서 “공보실장 전성천 실장에 의해 폐간 조치”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26일은 「경향신문」이 이승만 정부에 의해 폐‧정간되었다가 복간된 지 두 돌째 되는 날이다. 「경향신문」은 1959년 4월 30일 당시 공보실장 전성천에 의해 폐간 조치 되었으나, 소송 결과, 동년 6월 26일 자로 서울고법 특별 제1부의 ‘행정처분효력정지’ 결정으로 복간, 악착같은 공보실의 동일자 ‘정간 조치’로, 4‧19혁명이 있은 60년 4월 30일까지 361일 동안을 정간된 채로 있었다. 4‧19혁명이 일어난 지 한 주일 만인 재작년(1960년) 4월 26일 하오 1시, 대법원 연합부(재판장, 前조용순대법원장)는 ‘발행허가정지의 행정처분집행정지’ 결정으로 다시 신문이 나오게 된 것이다. 경향신문은 이와같은 결정에 따라 재작년 4월 26일부터 신문을 발간했다.”(경향신문 1962년 4월 26일자)



전성천은 이승만 정권 때인 1956년 7월 9일, 자유당중앙정책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59년 1월 31일 공보실장이 되었다. 전성천은 미국에서 보내온 막대한 원조금을 이승만과 이기붕의 정‧부대통령 당선을 위하여 마음대로 유용한 사실로 체포되어 1961년 5월 1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당시 신문은 “한국 최대의 낭비자”라며 대서특필했다.(“원조금 유용사건”은 별도로 다루도록 함)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성천은 「경향신문」 폐간 조치를 시킨 장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문이 자살했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경향신문」은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란 어마어마한 살생론을 떠벌린 전성천의 입은 교회에서 설교를 해오던 목사의 입이었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경향신문」 1960년 9월 12일 자)


“교회에서 설교를 해오던 목사의 입”이라는 구절이 눈에 띈다. 설교하던 “그의 입”은 “원조금 유용 사건”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모든 잘못은 부하가, 나는 도장만 찍어 모른다”라고 발뺌을 했다. 요즈음 내란재판 장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신문이 자살했다”라고 했던 그가 잡혀갔을 때. 「동아일보」는 그를 두고 “자살한 전성천”이라고 비꽜다.(「동아일보」 1962년 6월 5일자) 전성천은 2년 징역을 살고 1962년 6월 만기 출옥했다. 폐간의 피해자였던 「경향신문」은 1962년 6월 6일 자에 장문의 소회(素懷)를 실었다.



전성천 전 공보실장이 출소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묘하게 기분이 복잡하다. 출소 첫마디로 그는 “국민 앞에 속죄한다”라고 했고, “그동안 많이 공부했다”라고도 말했다. 한때 “신문 계의 염라대왕”이란 별명까지 얻었던 사람이 이제는 철이 든 것 같아 우선은 반갑다. 지금은 전직 공보실장이 되었지만, 사원들은 아직도 ‘全’ 자 소리만 들어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다. 한 번 크게 놀란 가슴이 지금까지도 진정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경향신문」이 2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전 실장에게 따로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듯, 말끝마다 “책임을 느낀다”, “속죄하고 싶다”, “많이 배웠다”라며 송구한 태도를 보이는 전 실장에게 더 뭐라고 하겠는가.

다만, 단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민주주의를 공부했다”고 자부하는 전 실장이 정말로 「경향신문」 폐간 처분이 언론 자유를 짓밟은 일이라는 사실을 몰랐느냐 하는 점이다. 전 실장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목사까지 겸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박사이자 목사인 전 실장이 이 정도 이치를 모를 리는 없다. 결국 부패한 정권의 ‘찬밥 덩이’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잘못인 줄 알면서도 눈을 질끈 감고 ‘앞잡이’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는 데 문제가 있다. 전 실장이 아니라, 전 ‘목사’의 솔직한 참회를 듣고 싶은 것이다. “폐간 처분이 내 이름으로 나갔으니, 주변 사람이 어떻게 했든 간에 책임은 내게 있다”라고 전 실장은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책임 의식이 상당히 강한 듯한 말투다.

그러나 지금 그런 말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향신문」은 “타살이 아니라 자살을 했다”라고 우겨대더니, 이제와서 “책임을 느낀다”라고 말한들, 책임을 느끼든 말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전 실장의 양식과 판단력으로 충분히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었음에도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데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전성천 씨는 공보실장을 그만둔다고 해서 먹고살지 못할 만큼 생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진리를 알면서도 눈을 감고 악에 굴복한 것에 한국 언론의 비극이 있었고, 박사이자 목사인 전성천 씨 개인의 비극도 있었다. 전성천 씨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새삼스럽게 “책임을 느낀다”라고 말하는 것도, “많은 공부를 했다”라는 것도 아니다. ‘박사’로서, 또 ‘목사’로서 진리 앞에서 신념을 지키는 사람이 되라는 것, 그것이 출소하는 전성천 씨에게 전하는 경향신문의 당부이다.

(「경향신문」 1962년 6월 6일자 “반사경”코너)



「경향신문」은 전 실장의 양식으로 충분히 사리를 밝힐 수 있었는데도, 먹고사는 지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데 의문이 든다고 하면서, “진리를 알면서도 눈을 감고 악에 굴복한 데 한국 언론의 비극이 있었고, 박사이자 목사인 전성천 씨 개인의 비극도 있었다”라고 안타까움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全’ 소리만 들어도 정신이 번쩍 날 정도로 상처를 안고 있던 경향신문은 당부를 한다. “‘박사’로서 또 ‘목사’로서 진리 앞에 좀 신념이 있는 사람이 되라”라고...


박사이며 목사였던 전성천은 1913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하여 일본 아오야마(靑山)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석사, 예일 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개신교 목사였다. 이후 전성천은 목사로 살다가 2007년 생을 마감했다.



p.s: 신문기사 현대어로 고침

참고:[한국교회사 80장면] (7)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 민주 수호의 선봉 가톨릭 일간지 뜻하지 못한 폐간 당해”(「가톨릭 신문」 제2567호 2007년 9월 23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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