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금 유용사건": 전성천(2)
전성천은 이승만 정권 때인 1956년 7월 9일, 자유당중앙정책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59년 1월 31일 공보실장이 되었다. 전성천은 3.15부정선거 때, 미국에서 보내온 막대한 원조금을 이승만과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마음대로 유용한 사실로 체포되어 1961년 5월 1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당시 신문은 “한국 최대의 낭비자”라며 대서특필했다.
당시 시카고 데일리뉴스의 특파원이었던 케이스 비치 기자는 직접 목격한 전성천의 3.15부정선거를 스타 레저지(The Star-Ledger)에 기고했다. 그의 기사는 미국의 원조를 받은 한국 정보의 공보기관인 공보실이 얼마나 자유당 정부와 추종자들에 의하여 악용되어 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케이스 비치 기자는 전성천이 “미국의 관용과 프린스톤 대학출신인 이승만의 무통제적인 태도의 덕택으로 非共産亞細亞諸國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선거전을 감행”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공보실장으로서 막대한 원조금과 KBS 방송망, 그리고 60만 달러나 들여서 만든 영화촬영소와 할리우드에서 공급하는 필름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영화제작을 위해 그는 원조금으로 미국에서 6밀리 영사기 100대와 발전기를 사들였다. 당시 비용으로 각각 600달러와 200달러 가량을 지불했다. 전성천은 이를 밑천으로 이승만을 영웅화하는 장편영화와 30여종의 기록영화를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했다.
영화를 제작하는 데 시일이 촉박하고 기술자가 부족하자 미 원조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일주일간 속성양성과정을 실시했다. 이때, 전성천은 이런 광경을 영화에 끼워 넣어 의도적으로 기록영화촬영이 미국의 지원과 승인을 받고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의 홍보물도 끼워 넣어 제작했다. 1962년 대구 국회의원선거에 입후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전성천은 자신의 공로를 묘사하는 30분짜리 기록영화를 만들었다.
(케이스 비치 記, 「동아일보」 1960년 5월 11일 자)
영화 뿐 아니라, 선거를 위해 공보실 비용으로 『우리 대통령 이승만박사』 70만 부, 『만송이기붕선생』 20만 부, 『우남시선』 5만 부 등 홍보 책자를 발행하여 배포했다.
결국, 전성천은 부정선거 혐의로 4.19 혁명 당시인 1960년 5월 20일에 구속기소되었다.(「동아일보」 1960년 5월 21일 자) 기소된 전성천은 첫 공판부터 모든 공소사실을 부인하면서 “모든 일은 아랫 사람이 꾸민 일이고 나는 도장만 찍어 모른다”라고 발뺌을 했다. 다음은 1960년 7월 21일 자 「조선일보」 에 보도된 공판 기사이다.
재: 피고는 검찰에서 진술한 허위공문서 작성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 밑에 사람들이 한 것입니다.
재: 공보실장으로서 책임이 없었다는 말인가
전: 예산지출은 재무관이 다했고 공보실장은 다만 도장만 찍었습니다.
재: 결재를 해놓고 형사책임이 없다는 말인가
전: 네, 그건 행정 책임이겠지요”
기자는 전 피고에 대하여 “결재 서류등의 증거를 재판장에 제시해도 처음 보는 것이며 말끝마다 모른다고만 잡아 뗐다”라고 기록했다.
당시 검사는 “1000여만 환의 부정한 돈을 썼다는 확실한 증거와 증인의 진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법죄 사실을 전부 끝까지 부인할 뿐 아니라 부하직원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은 미국 일류대학을 나온 철학박사요, 목사인 지성인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굴한 비인격적 행위이며 조금도 뉘우침이 없으므로 그 정상을 조금도 참작할 수가 없다” 라며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동아일보」 1960년 7월 22일자)
검사도 “미국 일류대학을 나온 철학박사요, 목사인 지성인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굴한 비인격적 행위”를 했다고 한 것을 보면, 그의 비겁한 진술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10년 구형을 받은 전성천은 1960년 7월 24일, 수감중이던 서울형무소 감방안에서 목을 매는 자살 시도를 했다고 한다. 자살 시도를 한 것에 대하여 전성천은 “자살이 하나님께 죄가 되는 줄 알고 있으나 참회하는 의미에서 죽으려고 하였다”라고 형무소 당국의 조사관에게 진술했다고 한다.(「동아일보」 1960년 7월 28일 자)
특별재판소는 1961년 5월 1일, 전성천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여기서 당시 재판장이었던 계창업(桂昌業) 판사도 언론탄압과 부정선거 혐의를 판결문에 고지했다. 그러나 경향신문을 폐간시켜 언론을 탄압한 점은 양형에 참작하지 않았다.(「조선일보」 1961년 5월 1일 자)
그는 2년 징역을 살고 1962년 6월 만기 출옥했다. 1962년 9월 16일자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출옥 후의 소회를 “내 나라 내 민족이 대의명분에 입각하여 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지른 과오에 대한 책임을 뼈아프게 져나가야 한다는 느낌뿐이었습니다”라고...
목사이자 박사로 이승만 정권시기 "신문계의 염라 대왕", "한국 최대의 낭비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전성천은 이후 정계를 떠나 개신교 목사로서의 삶을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