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 진두지휘자, 개신교 집사 최인규 장관
최인규는 이승만 정권 때 국회의원과 교통부 장관을 지냈으며, 1959년 3월 이기붕의 추천으로 내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내무부장관으로서 3·15 부정선거를 진두지휘한 혐의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61년 12월 21일 서울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3.15 부정선거 당시, 최인규는 각 시도 경찰국장과 경찰서장, 시장, 군수를 소집하여 매일같이 대책 회의를 열었다. “어떻게든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당선되어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갈테니, 어떤 수를 써서라도 표를 모으도록 하라!”라는 강경한 발언까지 하면서 부정선거를 진두지휘했다. 그 결과 선거에서 이겼으나 부정선거라는 사실로 4.19혁명의 불씨를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마산과 부산을 중심으로 부정선거에 대한 시위가 일어나자, 최인규는 시위대와 학생들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렸고, 체포한 시위대와 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고문을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4월 11일,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 학생 시신이 전국적인 분노를 일으켜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최인규는 체포되었다. 당시 「조선일보」 1960년 4월 30일 자에서 “不正選擧 指令 全貌”라는 제목으로 최인규의 검찰 심문 과정과 “눈물 흘리며 자백”했다는 그의 심정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검찰에 연행된 최인규는 법을 위반해서라도 이승만과 이기붕을 당선시키려고 했었고, 자유당을 위한 마지막 총알이 되어달라는 지령에 의하여 영웅심리가 작용했다고 자백했다. 마지막 총알이 되고자 했던 최인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승만 하야와 이기붕 일가의 자살에 대하여 자신의 탓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경향신문」은 1960년 9월 12일 자에서 제1 공화국 시대의 이들 개신교인들을 지칭하며 “종교의 탈을 쓴 정상배(政商輩)”이며, “기독교의 신성을 짓밟는 온갓 죄악상을 저지르고… 기독교적 신앙 양심을 저버린 사이비 신도”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최인규가 개신교회의 집사라는 사실을 알렸다.(「경향신문」 1963년 6월 13일자에서는 최인규의 부친 최병섭을 장로라고 보도함)
최인규는 1919년 경기도 광주(廣州)군 동부면 미사리에서 태어났다. 마을에 교회를 다섯 개나 세웠다는 여장부 할머니 밑에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최인규는 자서전에서 “선악(善惡) 간에 철저하고 과격한 성격, 타협할 줄 모르는 굳은 신념, 나라를 사랑하면 목숨을 바쳐서까지 하고 개인을 숭배하면 생사(生死)를 초월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백만 인이 반대하여도 무섭지 않은 등등의 성격이 모두 우리 조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적었다. 최인규는 1932년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속성과에서 공부한 교회 집사였으며, 뉴욕대학을 나온 남부럽지 않은 유학파 엘리트 개신교인이었다.
그의 말 중에 “이대통령과 그가 후계자로 지목한 이기붕씨를 각각 정‧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만 하면 여생이 편할 줄만 알았다”, “세상이 이렇게도 빨리 바뀔 줄은 정녕 몰랐다”,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는 격언이 뼈에 사무치기도 한다”라는 등등의 말을 남겼다.
그중에 이승만을 “당선시키기만 하면 여생이 편할 줄 알았다”라는 그의 말에서 복음의 공공성보다는 목숨을 걸고라도 사익을 추구하며 생존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84년, 미완의 『최인규 옥중자서전』(출판사 중앙일보사, 1984년)이 출간되었다. 수사기관의 권유를 받아 사형집행 직전까지 옥중에서 썼다고 한다. 최인규의 부인 강인화는 남편이 내무부장관이 된 후 자주, “하나님, 저에게 내무장관직을 주셨습니다. 과연 제가 감당해나갈 수 있는 직분인지 아닌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제 목숨을 뺏어서라도 이 직분을 버리게 해주십시오” 라고 통송기도를 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그는 내무부 장관이 된 지 1년여 만에 통송기도대로 목숨을 다하였다. 아마도 하나님 뜻이 아니었던 모양이다.(『최인규 옥중자서전』, 261쪽)
다음은 1959년 3월 21일에 진행된 내무부장관 취임사 일부이다.
“… 80평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바쳐오신 이 박사께서 국민의 오해를 받으실 때 그 어른의 억울하고 쓰라린 심정을 여러분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나라의 원수이신 이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고 그 어른 밑에 굳게 단결할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공산당이나 야당이 무슨 선동을 하여도 이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길이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는 최선의 길인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최인규 옥중자서전』, 250쪽)
그는 내무장관으로 1년여간 시무하면서 시정 목표를 이 대통령에 대한 절대 충성과 공산당의 뿌리를 뽑는 데 두었다. 그에게 있어서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546만 6870표를, ‘전(前) 공산당원’인 조봉암(曺奉岩) 진보당 후보는 216만 3808표, 그리고 신익희 추모표가 185만 6818표가 나왔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선거를 통한 체제 전복(顚覆)”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않으면 한국은 공산화될 수밖에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부정 선거를 해서라도 이승만의 당선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전력투구했던 것이다.
결국, 부정선거의 원흉이었던 최인규는 5.16 군사정변 이후 1961년 12월 6일에 열린 재판에서 사형을 확정받고 21일 교수형에 처해 졌다. 사형 뒤, 기자들이 장로였던 그의 아버지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을 하자, “임금께 충성하다가 역적들에게 목숨을 잃었으니 내 아들은 충신이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충신으로 죽음을 맞이한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긴 듯하다.
참고: 『최인규 옥중자서전』(중앙일보사,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