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을 앞둔 4학년 때 부랴부랴 운전 1종 면허를 땄다. 영업직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1종 보통이 필수인 곳이 많았다. 다행히 면허는 크게 어렵지 않게 땄다. 면허만 있지만 금세 도로로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일단 차가 없었다. 그나마 선배형 차로 주행연습을 했는데 아직 핸들 조작이 미숙했던 탓에 그만 주차된 차를 긁어 버렸다. 그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면허증은 장롱 속 깊숙히 고이 모셔두었다.
대학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운전과는 더욱 멀어졌다. 간단한 행정절차를 통해 한국 면허증으로 일본 면허증을 발급받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국인 등록증을 대체할 (덜 외국인처럼 보이는) 신분증으로 쓸 목적이었다. 심지어 핸들도 오른쪽에 있고 교통신호체계도 다르니 도로 위 세상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언젠가 완전 자율주행차가 생기면 그때! 운전을 하리라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다. 이 결심은 2020년 말까지 이어진다.
일본에 살면서 운전을 못해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시골 구석구석까지 기차나 버스노선이 있어 웬만한 곳은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편리성 때문에 도쿄 같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정년퇴직할 때까지 운전대를 잡아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한 차를 구매하려면 주차장이 필요한데 임대료로 월 수십만 원 들어가니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다. 차를 포기하는 편이 여러모로 이익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욱더 운전대를 잡아야 겠다는생각과는 멀어졌다.
그러던 2020년 12월, 운전에 대한 생각이 180도 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말연시 여행으로 일본 최남단에 위치한 오키나와로 여행을 떠나게 되면 서다. 오키나와는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관광명소 중 하나. 저렴한 티켓을 구하게 되어 가게 되었지만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차 없이는 다니기 힘들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일본이 아무리 교통편이 발달해 있다고 해도 중심부를 벗어나면 역시나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배차간격이 한 시간에 1~2대 꼴인 경우도 있다. 오키나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오키나와에서 가고 싶은 곳들을 미리 리스트업 해두고 인터넷으로 차량 배차간격도 확인했다. 하지만 어디 여행이 계획처럼 순조롭게 흘러가던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목적지에서 더 오래 머물게 되거나 길을 헷갈리는 바람에 버스를 놓치기 일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종잡을 수 없는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조금 전까지 햇빛이 쨍쨍 내리쬐더니 이내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택시도 없고, 버스는 한 시간이나 뒤에 올 예정이고 길도 헷갈리고 근처에 오픈한 카페, 심지어 사람도 없고 몸은 땀과 비에 젖어버렸고… 3박 4일간의 첫 오키나와 여행은 이렇게 버라이어티 하게 마무리되었다.
도쿄로 돌아오자마자 장롱 면허(일본에서는 페이퍼 드라이버라고 한다.) 운전 교습소에 연락을 해 하루코스 도로주행교육을 신청했다. 예약이 밀려 한 달 뒤에서야 도로주행을 할 수 있었다. 숙련된 조교 선생님이 있다고는 하지만 십 년 만에 운전대를, 그것도 반대편에 있는 일본에서 잡는다는 것은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어로 설명을 들어가며 신호도 봐야 하고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장애물도 피해야 하고. 핸들을 잡은 손과 이마는 금세 땀으로 젖어들었다. 그렇게 8시간에 걸친 도로연수가 끝이 났다.
운전연수 전후로 유튜브를 통해 운전강의를 계속해서 찾아보았다. 한국, 일본 가릴 것 없이 보면서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계속했다. 감각을 기르기 위해서는 역시 운전을 직접 해 보는 것이 제일 빨랐기 때문에 부담 없이 차를 빌릴 수 있는 셰어카 서비스에 가입했다. 약 2주 뒤 셰어카 회원증이 발급되었고 생애 첫 진짜 운전을 시작했다.
일본에는 초보 마크가 있다. 반쪽은 노란색, 반쪽은 초록색인 방패 모양 마크다. 자석으로 되어 있는 이 마크를 셰어카 앞, 뒤에 붙였다. 고령자 마크도 있는데 이들 마크를 붙인 차량이 보이면 대체로 양보해 주거나 피해 가거나 한다. 도로연수를 끝내고 일 년 정도는 초보마크를 붙이고 다녔다. 그래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느린 주행이나 차선변경에도 뒤차의 크락션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속으로 욕했을지도 모르지만.) 초보에게 이보다 좋은 환경이 있을까.
어느덧 시내 주행과 비좁은 주택가, 복잡한 역 주변 주행도 순조롭게 하게 되었고 초보 시절 가장 긴장되었던 고속도로 합류도 점차 익숙해졌다. 주간, 야간, 폭우, 폭설 주행 모두를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초보 딱지를 떼게 되었다. 그렇게 일본에서 3년간 운전경험을 쌓았고 딱 두 차례, 모서리에 차를 긁어먹은 걸 제외하면 사고는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는 중고차 하나를 마련했다. 이번에는 일본과 반대인 핸들에 익숙해져야 했고 교통체계도 다시 익혀야 했다. 한국에 이따금씩 올때면 쌩쌩 달리는 차들과 크락션 소리에 흠칫 흠칫 놀라고는 했다. 과연 내가 한국에서 운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다시 초보로 돌아간 것처럼 핸들을 잡은 손이 금세 땀으로 젖어버렸다.
한국 도로에 가장 적응이 어려웠던 것은 단연 속도 단속 카메라이다. 단속 카메라에 가까워져 가면 내비게이션에서 경고음이 연신 울려댄다. 일본에서는 경험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특히나 시도 때도 없이 단속카메라가 있는 고속도로는 더욱 어려웠다. 조금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이내 단속 카메라가 등장한다. 일본에도 도로 규정속도가 있지만 단속 카메라는 거의 없다. (있다고는 하는데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이따금씩 경찰이 숨어 있기는 하다.)
그다음은 우회전. 보통 신호에 따라 좌회전, 우회전이 결정되는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경우 우회전 신호 없이 바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다만 얼마 전 교통 법규가 바뀌면서 사람이 다 건널 때까지 일시정지를 해야 한다. 그런데 뒤에서 귀가 떨어질 정도로 클랙슨을 울려댔다. 처음에는 내가 실수한 건가 싶어 긴장했지만 뒤차가 규칙을 어겼다는 (또는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극악의 난이도는 끼어들기.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보를 안 해준다. 앞쪽에 충분히 공간이 있어 끼어들려고 하면 갑자기 속도를 높여 끼어들기를 방해한다. (고의이거나 또는 몰랐거나). 그리고 여기저기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들기하는 차량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차들은 앞의 도로상황이 어떤지 모르는 상태에서 안전거리 없이 내 차 뒤로 최대한 밀착한 다음 쌍라이트를 켜단다. 어쩔 수 없이 옆차선으로 비켜주었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다 결국 내 차보다 뒤처진다. 무법천지가 따로 없다.
운전이 익숙한데도 이렇게 진땀 뺄 상황이 많은 것 보면 한국 운전은 확실히 난도가 높은 것 같다. 운전에 겁먹었던 대학시절의 나는 없고 무리 없이 서울 도심을 주행한다. 그러다 이따금 한강 위 도로를 지나갈때면 이런 생각을 하고는 한다.
"일본에서 운전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장롱면허였겠지?“라고. 일본에서 초보딱지 떼고와서 천만 다행이다. 언제 나올지 (내 손안에 들어올지) 모르는 완전 자율주행 자동차를 기다리는 것 보다 백번은 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