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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민 Jul 07. 2022

일본에서 왜 살고 싶었냐면

그러니까 좋았어요. 그날의 추억이. 

영어가 싫어서 공부했던 일본어.


그것이 나와 일본과의 첫 인연이었다. 집에는 어머니가 이따금 취미로 보시던 일본어 첫걸음 교재가 있었고 어순도 한국어와 비슷하니 배우기 쉬워 보였다. 외국어는 배우고 싶은데 영어는 도저히 재미가 없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일본어였다. 


일본어, 그리고 일본과의 인연의 시작



고등학교 2학년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했다. 둥글둥글하게 쓰는 히라가나와 거침 없이 획획 그어쓰는 가타카나는 시각적으로도 영어에 비해 재미있었다. 그리고 일본어 수업시간은 다른 시간에 비해 친구들과 딴 짓 하기 좋았다. (선생님이 안무서웠기 때문에...) 그렇게 일본어를 알아가고 있을 무렵 일본어 선생님의 입에서 나의 인생을 바꾸어 버린 말이 나온다.


"시(市)에서 여름방학 일본 홈스테이 참가자 모집을 한다고 해. 관심 있는 사람들은 얼릉 지원해둬. 참고로 내가 지도교사로 참가할거야."


당시 내가 살던 속초시는, 일본 돗토리현 요나고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고 여름방학 중 3박 4일 일정으로 관내 중고등학생 중 일부를 선발하여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개최했다. 모집인원은 대략 30명 내외였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학교에서만 가면 가능성 있었겠지만 속초시내 전체 중고등학생 (6개교)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선발조건이 있었고 내신성적이 반영 되었는데 하필 나는 중간에서도 밑에 있는 아이였다. 그래서 사실상 포기를 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모집은 마감되었다. 


그날도 청소 담당구역인 학생주임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곳에 일본어 선생님 자리도 있었다. 열심히 마대걸레질을 하고 있는데 일본어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자 마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내 뱉었다.


"선생님. 저도 일본 보내주세요!"


3박 4일간의 짜릿했던 일본에서의 추억 


"이미 마감했는데 어쩐다... 그리고 너, 수업시간에 딴 짓 하잖아?!"

"앞으로 잘 들을게요! 정말 열심히 할께요. 너무 가고 싶어요. 꼭 좀 데리고 가주세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본어 선생님에게 집요하게 부탁했다. 아마 살면서 그렇게까지 간절히 무언가를 졸라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좋아... 그럼 내가 어떻게 해서든 추가로 자리 마련해 볼테니까, 대신 너는 이번 기말고사때 일본어시험 100점 맞도록 해."

"네!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 이후로 일본어 수업시간에 절대 딴짓하지 않고 선생님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일본어 교과서도 달달달 외웠다. 그 결과 놀랍게도 나는 1학기 기말고사에서 일본어 시험 100점을 맞았고 선생님은 정말 약속대로 나를 홈스테이 추가 선발 인원에 넣어 주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추가인원을 넣기 위해 일본쪽에서도 급하게 홈스테이 가정을 추가로 섭외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일본 홈스테이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일본. 인천공항에서 오사카에 있는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입국한 우리 일행은 오사카성 일대를 둘러보고 버스로 4시간정도 떨어진 요나고시로 향했다.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 답게 속초 같이 정겨운 느낌의 작은 시골 도시였다.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 조차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곳에서 강인한 충격을 받았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10년 후 미래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길거리에는 다양한 종류의 자판기가 가득 했고 식당에서도 자판기에서 식권을 뽑아 주문을 했다. (당시 우리나라, 적어도 속초에는 그러한 식당이 없었다.) 18살 소년의 눈에는 그마저도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맞이해준 홈스테이 가정. 50대 중년 부부와 딸 부부, 그들의 아이(손자)가 함께 살고 있는 집이었다. 추가로 배정 된 곳이었기에 또래의 친구는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일본어라고는 '오하요우고자이마스', '아리가토고자이마스' 같은 인사말정도 밖에 하지 못했고 서로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3박 4일간 성심을 다해 나를 대해주었다. 마지막날 저녁에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했던 바베큐 파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친절했던 일본 사람들


3박 4일 중 하루는 홈스테이 가족들과 자유일정이었다. 그날은 나를 데리고 지역의 관광지로 데리고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머지 가족들은 일정이 있어 이 집의 어머니 근처에 있던 다른 홈스테이 팀과 함께 이동했다. 


대략 목적지 인근까지 온 것 같은데 왜인지 같은 자리를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느낌상 길을 헤매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다 어머니가 지나가던 행인에게 프린트 해 온 종이를 보여주며 위치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직 스마트폰이 없던 때이다.) 


"그럼 절 따라오세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당연히 말은 못알아 들었지만 그 행인이 이렇게 말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대략 5분여정도 걸어서 목적지 입구까지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었다. 너무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길을 물어 볼 때면 못들은 척 하거나 갈길 바쁘다고 휙 가버리는 경우들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길을 알려주는 걸로도 부족해서 직접 데려다 주다니! 


그리고 식당을 가도 친절한 종업원들 뿐이었다. 수저, 그릇 하나 조심 조심 놓고 언제나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그릇을 툭툭 놓고 가는 우리나라 (일부)식당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들이 일본에서는 아니였던 것이다. 


그렇게 순도 99.9%의 좋은 기억만을 가진채 홈스테이 일정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역사교과서나 자라오면서 수도 없이 들어왔던 사악한 일본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보고 느꼈던 감동은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일본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2022년 7월 7일 목요일 오후 17시 현재. 나는 일본 도쿄의 한 맨션에서 브런치를 쓰고 있다. 그때 그 감동의 흔적을 찾으려 애써보며. 


※일본 거주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에세이입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려고 했으나 일부 편협한 부분이 있을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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