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똑똑’. 집주인이 월세를 재촉하는 소리. 이것은 인류 최고의 음악이라 불리는 베토벤 운명 교향곡의 모티브이 되었다.
“계세요~?"
나는 숨을 최대한 가늘게 쉬었다. 사장님은 몇 번 더 나를 부르더니 문자를 남기고 돌아갔다. 작업실에 창문이 없는 건 정말 다행이다. 나는 또다시 4차 방어에 성공했다.
아르바이트를 잃은 지 한 달이 되어간다. 내가 일하던 재즈클럽은 월급을 몇 달째 미루더니 결국 폐업을 하고 말았다. 아직 마지막 월급을 받지 못했는데 이것이 밀린 월세의 정체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 했다. 한가한 오늘, 기필코 불후의 명곡을 쓰고 말 것이다. 어젯밤 몇 시간의 산책 끝에 정말이지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20세기 마지막 명작으로 불리는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의 명대사를 가사에 오마주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극장판 한 편을 본게 전부인 나로서는 해당 가사의 적합성을 검증하기는 무리가 있다. 때문에 음악을 만들기에 앞서 에반게리온 전 시리즈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5인치의 커다란 스피커와 32인치의 작업용 모니터로 보는 영화는 나에게 더욱 큰 영감을 불어 넣어줄 것이다. 지금은 오전 11시. 딱 2시간만 보고 곡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눈이 너무 아프다. 지금은 새벽 3시. 에반게리온 시리즈 전편과 다양한 해석의 유튜브 콘텐츠들을 돌려 봤다. 웅장한 에바의 세계에 얼이 나가버렸다. 겨우 음악 프로젝트 창을 켰지만 충혈된 눈과 피곤해진 몸은 도저히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최선을 다해 몸을 일으켜 영감의 여신을 불러 보았지만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창문 없는 지하에서 맞이하는 칡흙의 아침. 나는 밀린 월세를 내기 위해 지구 최강의 아르바이트, 야간 택배 상하차를 하러 간다. 낯선 아저씨들과 버스를 타고 산속에 자리한 물류창고에 도착했다. 일의 강도는 역시나 강력했다. 내가 지쳐서 쓰러질 즈음 담당자는 눈치를 주며 우리의 속도를 조절한다. 어제 봤던 에반게리온 때문에 일하는 내내 이카리 신지가 눈에 아른거린다. 그리곤 몇 번의 잔 실수로 상욕을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고 민폐를 주는 ‘인간 이하’가 되는 경험. 이런 경멸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백번 이해가 된다. 택배 상자에 얻어 맞아 얼굴에 흉터가 나거나 자칫 컨베이어 벨트에 발이 껴서 실려 나가면 일당은 커녕 보험도 되지 않는, 위로 없는 고통만이 남을 뿐이다. 여기서는 보통 실수를 하면 복식 발성으로 상스러운 욕을 들이박는다. 나도 이젠 10번은 넘게 온 것 같은데 아직도 능숙한 육체 노동자가 되지 못해 어버버 멀뚱히 서서 욕을 먹고 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 위한 역사의 일부분일 뿐! 오늘 처먹은 욕을 가사로 쓸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세어 나왔다.
여기 올 때는 항상 주머니 넣을 수 있는 시집을 가져온다. 그리고 담배 타임이 시작되면 비상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책이 오늘은 땀에 젖어버렸다. 올해 겨울에 왔을 때는 몰랐는데 땀이 속옷까지 다 젖어버린 것이다. 책을 폈는데 머리카락 타고 내려간 땀방울들이 후두둑 책에 쏟아졌다. 무슨 상관이람. 시는 달콤하다. 3-4편의 시를 읽고 8분이 지나면 다시 뛰쳐 돌아간다. 나를 붙잡는 시가 발견되면 택배를 옮기면서 그 시를 읊어본다. 밤은 달콤한 시가 된다.
모두가 출근하는 아침 9시. 나는 현금으로 받은 13만원을 주머니에 넣고 먼지 덮인 추리닝으로 작업실로 돌아갔다. 도착하자마자 라꾸라꾸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잠을 자야 하지만 몸은 자꾸 경련을 일으킨다. 지나친 육체 노동으로 몸이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다. 가쁜 숨을 쉬며 오랫동안 잠이 들지 못했다. 겨우 잠이 왔을 즈음 문자 하나가 나를 깨웠다.
‘오늘 2시에 미팅 오실 수 있으신가요?’
나와 오랬동안 일해왔던 엔터 회사 대표님은 방송인 A씨와 100만 유튜버 B양과의 미팅을 오래전부터 추진했다. 그리고 내가 그 둘 작품의 프로듀싱을 맡았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었는데 하필이면 이 시간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가능합니다. 강남역 스튜디오 맞죠? 근처에 마침 미팅이 있는데 잘됐네요. 하하. 2시에 뵙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재정상태를 확인했다. 카드는 연체로 막혀 있었지만 교통카드는 다행히 살아있었다. 그리고 입을 옷을 확인했다. 현금이 없어서 3주째 코인세탁을 하지 못했다. 절망할 무렵 옷걸이 밑에 떨어져 있는 반 팔을 발견했다. 나는 재빨리 냄새를 확인했다. 오 신이시여. 이건 도저히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하지만 좌절할 수는 없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바람막이를 발견했다. 바람막이를 목 끝까지 올려 미팅이 끝날 때까지 내리지 않는다면 승산은 있다.
방금 먼지 덮인 추리닝으로 왔던 길을 지나 강남 스튜디오로 향한다. 놀랍게도 경련은 멈추었고 피곤은 사라졌다. 나는 집중력을 발휘해 미리 조사했던 두 연예인의 정보를 다시 확인한다. 그들보다 미리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한 손에 쥐고 온 <미학의 역사>를 꺼냈다. 남는 시간을 독서로 채우는 지적인 뮤지션의 이미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미메시스는...’
도저히 읽혀 지지 않는 글을 읽으며 아무도 모르게 냄새를 다시 확인한다. 젊은 사내의 땀냄새, 가난에 찌든 신내가 수치스럽게 이글거린다. 재빨리 지퍼를 닫으며 다짐했다. 회의중에 절대 지퍼를 내리지 않을 것. 그럼에도 예술가의 존엄을 잃지 않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