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바벨탑과 불통의 시대

평범한 언어로 성령을 사유하다

by 나모다


흔히 종교의 틀을 쓰게 되면, 선입견이 작용한다. 이성을 넘어서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하게 된다. 이성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서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으니 논외로 하고 이성의 범위 안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 다루어보겠다.


성령 (holy spirit)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상像과 함께 전달된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이상한 기운, 사람을 완전히 변하게 하는 어떤 힘, 초자연적 치유능력, 고통을 이기는 힘.... 성경에는 다양한 사례가 소개된다. 불치 병자가 낫거나, 오래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거나, 어눌한 사람이 갑자기 훌륭한 연사가 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소위 방언이라고 하는) 말을 하거나 해석하거나, 미래의 일을 예측하거나...

기록자의 기록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기록되기도 하고, 의도에 따라 방향이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이야기 서술도 그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면 좋겠다.


성경에는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의 영에 대해 기록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장 2절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상 16장 13절


그런데 예수는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 성령을 받으라고 한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장 21-22절


사도행전에는 기독교에서 성령강림절로 지내게 되는 기원이 되는 성령강림의 현장을 기록한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이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장 1절-4절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의 말로 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창세기 11장에는 유명한 바벨탑 사건이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1장 6절-7절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오르려는 사람들을 흩으며 다양한 언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해본다면, 바벨탑 이전에 서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 이후에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말이 된다. 이 사건 역시 신화적인 서술로 보인다. 역사 속에서의 신화라는 것도 분명하게 그 역사를 반영한다. 역사의 어떤 인물,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중요하고 의미 있다. 여하튼, 바벨탑 사건으로 인간은 이전의 상태를 잃게 되었다. 이전의 상태는 서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서로 소통되었다. 그런데 이제 알아들을 수 없다.


원래 알아들을 수 있는 상태로의 회복을 위해 인류는 오랜 여정을 보내고 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성령의 강림으로 설명한다. 성령이 온다는 것은 외부의 것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내재한 것에 대한 각성, 눈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을 알아차린 몇몇 선각자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했고, 가장 두드러지게 이야기한 사람이 예수이다.


예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는다. 제자들까지 그를 부인하고, 팔아넘겼고, 도망쳤다. 그럼에도 예수는 그들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성령을 불어넣으며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한다. 그중에 회심한 제자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예수가 전한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죽음을 불사하고.


성령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미 태초부터 있던 것이고 (창 1:2)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다. 그것에 눈뜰 때 서로 알아듣게 된다. 단절이 연결로 변한다. 어떤 특정한 시점에 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알아차린 사람들의 고백이 있었고 굳이 특정한 성령강림의 폭발적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은 연대기적인 관점을 너머 이미 있었던 성령을 어느 시점에 집약적으로 수렴한 지점 (convergent point)이다.


지난번에 베드로의 변화가 궁금하다고 했다. 성령과 관련된 구절들을 읽으며 그 변화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는 단절되었던 것을 풀고 뜬 눈으로 소통하게 되었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그래서 삶의 방향도 달라졌고, 보통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지언정 행복할 수 있었다.


2000년 전에 기록된 문서의 진위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믿느냐 마느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분명한 것은 그 안에 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알맹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종이도 제대로 없던 때부터 구전되던 것을 일일이 써서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보관하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연결되어 전파되고, 죽음을 불사하고 전했던 것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저 믿고 복 받는다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알아듣지 못한 것에서 알아듣는 것으로 변하는 그 분기점에 있는 성령. 그것이 괴상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있다는 것. 단지 눈뜨지 못했다는 것.


내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으며 좀 더 겸손한 자세로 이 모든 것에 나아가고 싶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이 자기 삶에 임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일상적인 언어로 사유해 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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