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필요한 것을 선택한 사람

마리아와 사마리아인의 공통점

by 나모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복음 10장 25절)



한 율법 교사가 예수에게 영생에 대한 질문을 했다. 정작 영생에 대해 알고 싶어서라기 보다 대중에게 인기인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예수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오래전부터 영생에 대해 아주 궁금하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중국의 진시황은 불로장생不老長生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천하를 호령하며 가질 것 다 가진 왕이었지만 생명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없었고 어떤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으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오랜 기간 아니 지금까지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유한한 생명을 넘어서는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고 추구하고 있다. 제법 성과가 있는 모양이다. 수명은 연장되었고 과학 기술에 의해 어쩌면 영원한 생명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장밋빛 전망을 갖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여하튼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시 율법 교사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율법 교사의 질문 의도는 마음에 들지 않으나 질문은 나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은 무엇이었을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의 대답과 율법 교사의 질문은 매치가 안되어 보인다. 율법 교사는 예수의 대답에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려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을 한다. 이에 예수는 강도 만난 사람과 그를 도와준 사마리아인의 예화를 든다. 사마리아인은 당시 유대지방에서 혐오의 대상이었다. 유대인들은 어떤 목적지를 갈 때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야 한다면 피하여 다른 쪽으로 돌아갈 정도로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가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는데 당대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제사장과 신분상 높은 위치에 해당했던 한 레위인은 강도를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반면 미천한 지위에다 혐오의 대상이었던 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그의 치료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는 것이 곧 영생을 얻기 위한 방법이 된다는데...


영생과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이웃에 대해 실제적인 사랑을 행하는 것이 영생을 얻기 위한 방법이라는 말에 이어 유명한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손님을 맞이 하느라 분주한 마르다는 아무 일도 않고 가만히 앉아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가 얄미워 예수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그런데 예수는 가만히 앉아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가 빼앗기지 않을 실상 필요한 것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고 빼앗기지 않을 것이요.
누가복음 10장 42절


두 가지는 모순되어 보인다. 한쪽은 실제로 사랑을 실천한 행위를 영생을 얻기 위한 태도로 보았고 또 한쪽은 손님 대접에 분주하기보다 조용히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가장 필요한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았다. 실천인가?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경청이나 기도인가? 마르다와 마리아가 상징하는 것과 관련한 이 논쟁은 오랫동안 뜨겁게 답이 묘연한 채 지속되고 있다.


문제는 마리아냐 마르다냐가 아니다. 문제는 경청이나 기도이냐 사랑을 행하는 행위이냐가 아니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이분법은 그저 우리의 기준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행위를 하든 그 본질적 정신이다. 기도를 해도 본질적 정신에서 벗어났다면 영생과 거리가 멀고, 이웃을 도와도 본질적 정신에서 벗어났다면 또한 영생과 거리가 멀게 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하든 본질적인 정신이 무엇이냐 하는 데 있다. 마리아처럼 온전한 마음으로 경청함은 곧 주인의 뜻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사랑이라는 행위로 이어진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즉 존재의 근원과 하나가 됨은 곧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됨이며 이것은 곧 이웃과의 하나 됨으로 이어진다. 더 이상 나와 너의 분리가 없고 하나가 된다. 사마리아인의 행위가 기억되어야 할 이유는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가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그와 하나가 되었다는 데 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사랑하라는 말은 사랑하면 영생하는 것이며 영생은 곧 사랑이라는 말이 된다. 더 이상 너와 나의 구분이 없다. 나를 사랑하듯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 지점은 마리아가 경청하는 지점이며 사마리아인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외면하고 지나친 강도 만난 자를 도운 지점이다. 이 순간이 바로 영생이다. 진정 살아있는 순간이다. 죽고 나서 가게 될 알지 못하는 나라는 지금 내가 헤아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아마 있다면 마리아와 사마리아인이 경험하는 그 순간의 본질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현실의 문제에 대입해보자. 학교에 많은 규칙이 있고 바쁘게 돌아가는 일들이 있다. 그 일들을 아무리 열심히 한들, 그 안에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은 사람 돌보기를 외면하고 있다면 그곳에 영생은 없다는 말이 된다. 한 국가에는 여러 가지 영역 별로 많은 법이 있고 나라의 질서 유지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일들을 하고 있다. 그 일들을 아무리 열심히 한들, 그 가운데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은 사람을 아무도 바라보지 않고 지나친다면 그 또한 그곳에는 영생이 없다는 말이 된다. 개인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무리 기도를 하고 아무리 종교집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교리를 열심히 공부한다 해도 내 주변에 강도 만난 것과 같은 사람이 있는데 그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곳에는 영생이 없다는 말이 된다. 영생이 없다는 말은 곧 가장 중요한 필수적인 것을 놓쳤다는 말이 된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높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자신을 외면하고 돌아섰을 때 절망하였겠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사회적으로 미천하다고 여기는 사마리아인에게 오히려 도움을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그는 분명 그곳에서 영생을 경험했을 것 같다. 그 상황에서 그는 삶의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을 것 같다. 강도 만난 것 같은 절박한 상황에 있을 때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 건네준 한잔의 물이 나를 일으켜준 적이 있다. 누군가 건네준 마음 한 자락이 내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준 적이 있다. 그 순간이야말로 바로 영생의 순간이 아닐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의 말에 집중하고 향유를 부어 그의 발을 씻기는 행위가 상징하는 바는 가장 중요한 것에의 경배이며 감탄이며 존경을 의미한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 그만의 선택이었다.


영생은 길이로 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닌 듯하다. 왜 영생에 관한 질문에 강도 만난 자의 참 이웃 사마리아인의 예가 등장하는가? 왜 마리아의 경청을 강조하는가? 그들의 드러난 행위보다 그 안에 숨겨진 본질이다. 그렇다면 영생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황금률이 행해지는 그곳, 이웃과 내가 더 이상 분리되지 않은 그곳이라면 어디든 언제든 영생의 순간이며 영생의 장소이다. 따라서 영생은 지금 여기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생을 경험하고 있는 마리아를 예수는 칭찬했다.




영생을 오래오래 산다고 하는 3차원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추상적이고 묘연하고 실체가 없어 보이는 영생이라는 단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진정으로 나와 너의 분리가 없고 너를 나처럼 바라볼 수 있는 관점으로 영생의 신비를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놓쳐서는 안 되는 필수의 것이라면 삶의 궤도를 다시 점검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반성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명! 그것의 신비를 놓치지 않고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리아와 사마리아인 그들이 경험한 그 무엇을 깊이 고찰하고 싶어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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