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친구들과의 모임을 하고 돌아갈 때 혹시 이런 적은 없었나요? K의 이야기를 옮겨봅니다.
“ 친구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 씁쓸했어. A는 교육, 경제, 개인관리 어느 것 하나 빈틈없어 보이는 친구야. 요즘 같은 코로나 상황에 치솟은 항공료 상관없이 몇 주간의 스위스 산악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야기를 하더군. 그 자체가 별로 부럽지는 않은데 왜 그런지 그의 승승장구 소식을 들으면 여기저기 빈틈이 많은 나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 불안해지기 시작해. B는 친구들 사이에서 최고의 부부 케미를 자랑하고 거의 남편 흉을 보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 잘 키워 결혼시켜 외국에 가서 사니 남편하고 둘이 신혼의 시간을 보내는 중인데 남편의 일터가 있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새로운 변화에 들떠 있더군. 그런데 그의 즐거움에 솔직히 동조할 힘이 없었어. C는 딸의 청첩장을 가지고 왔어. 결혼시기가 점점 늦어지는 요즘에 이른 나이에 배우자를 만나고 주거문제를 해결한 능력자들의 소식을 들으면 내가 갑자기 부족한 사람이 된 것 같아.... ”
"취업을 하느라 정기적으로 참석하던 모임에 오래 참석하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동아리 모임에 참석했어. 사실 나를 반가워하며 나의 자랑스러운 취업을 그들이 함께 기뻐해 주기를 기대했지. 그런데.... 영혼 없는 인사를 하는 사람과 애써 외면하려는 듯한 무관심이 기다리고 있더군. 기대에 부풀었던 내 마음이 풍선인형처럼 쪼그라들었어. 넌 이런 적 없니? "
1. 원하지 않는 감정의 정체
친구 모임이든, 동아리 모임이든 만나고 오는 마음에 일어나는 반갑지 않은 감정은 K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자주 우리가 둥둥 떠있는 섬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전화기에 연락처는 점점 쌓이고 이미 온라인상의 그룹도 넘쳐날 정도로 연결이 많이 되어 있는 것 같지만, 정작 타인에 대한 관심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흔쾌히 그렇다는 대답을 하기 힘들어 보인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관계가 피곤해질 때가 많다. 그럼에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인간관계를 소홀히 할 수 없어 이런저런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친한 친구들 모임에서조차 정작 오고 가는 이야기는 가족 자랑에 이어 흉 보기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는 하는데 불편함과 공허감을 느낄 때가 있다.
왜 그런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그 배경에는 경쟁구도의 사회 시스템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누군가가 승자가 되면 패자가 생기는 구도 말이다. 그래서 타인의 승리? 가 나의 패배로 이어지는 제로섬 공식을 숙명처럼 끌어안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나 마음도 그 구조의 생리에 따라 작용한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타인과의 경쟁, 비교의식에 지배당한다면 타인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 되는 경우가 많다. 뿔뿔이 흩어진 섬처럼 각자도생 하느라 옆에 사람 기웃거릴 여력이 없게 된 사람들은 당연히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가 없어진다.
이런 상황에 아이러니하게도 경쟁과 비교는 나쁘다는 관념이 있다. 해서 이 판단은 또 한 번 다른 종류의 불편함을 가져다준다. 이중고통이다! 늘 만나는 이런 이중고통의 사이클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2. 소멸과 영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편 146편 3절-4절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중이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시편 146편 5절-6절
시편 저자의 고백에서 두 개의 대조되는 개념을 발견한다. 인생의 소멸 그리고 영원이 그것이다. 영원(immortality), 없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생각과 감정은 영원히 지속하지 않는다. 어제의 불편한 감정은 또 어느새 사라지고 새로운 감정이 나타난다. 어제의 생각도 오늘이 되면 바뀌고 이것이 시간의 축적을 겪으면 가치관도 바뀐다. 심지어 몸도 날마다 바뀐다. 몇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몸인데 그 세포가 계속 소멸과 생성을 거듭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바뀌는 그것이 나라고 할 수 있을까? 항상 바뀐다면 나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규정할 수 없다면 나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은 무엇인가?
인생은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생각이 소멸한다. 생각뿐 아니라 그 생각을 품고 있던 몸도 소멸한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영원한 진실됨이 있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바뀌지 않는다 즉, 영원하다는 것은 소멸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뭔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변화무쌍한 이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너머 변하지 않는 시선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영원성의 본질이다. 예컨대 십자가에 죽어갔지만 그 순간에도 영원을 잃지 않은 예수의 존재방식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가시덤불에서 I am who I am이라는 절대 근원의 음성을 들었다. 구약시대에 절대 근원의 얼굴은 다양한 방법으로 현현顯現되었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며 근원을 만났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가는 과정에서 은밀히 은밀한 얼굴을 만났을 것이다. 수많은 선지자들도 그들의 방식으로 근원의 얼굴을 만났다. 성경 저자들이 여호와라 표현한 그 개념은 바로 영원, 존재의 근거 등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의 그들 나름의 또 다른 이름으로 생각해보겠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선책으로 제시한 율법의 글자 하나하나에 얽매어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신(여호와)은 인간의 모습으로 와야 했고 예수는 그 현현이었다. 영원을 거두고 소멸의 세상으로 왔다. 소멸되었으나 소멸되지 않았다. incarnation(성육신)! 우리가 소멸하는 세상에 사는 방식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영원 안에 있는 소멸. 소멸하지만 소멸하지 않는 존재로서의 삶. 불행히도 예수가 깨고자 한 굴레를 사람들은 다시 이름만 바꾼 형태로 덧씌웠다. 예수 이후에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라는 또 다른 틀에 갇히고 본질을 잊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지금도 새로운 예수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탄생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 또한 악순환이다.
3. 소멸을 넘어 너를 만나고 싶다
감정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왜 그런 감정이 일어나는지에는 여러 가지가 원인으로 작용한다. 인간관계, 사회구조, 생물학적 특성......
빛은 어둠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사랑은 미움을 전제한다. 기쁨은 슬픔을 전제한다. 따라서 빛만 있을 수 없고, 사랑만 있을 수 없고, 기쁨만 있을 수 없는 것이 3차원 세상의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빛과 사랑만 기쁨만 추구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따라오는 감정은 어쩔 수 없다. 감정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것의 실체를 볼 수 있다면 어느 부분에 공간이 생기고 영원이라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편 저자의 통찰에 주목해보자. 인생을 의지하지 말며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말은 곧 변화무쌍한 생각, 감정 너머의 영원한 근원을 의지하라는 말이며, 다른 차원의 시선을 가지라는 말인 듯하다. 오늘도 나는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감정을 일어나는 감정으로 여기며 그 너머에 흔들리지 않는 근거에 대한 신뢰를 놓치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이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기웃거리며 변하는 감정에 변하는 사람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노력과 상반되게 삶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변화무쌍한 소멸하는 것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왔다가 영원히 머물지 않고 가는 것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강력한 것의 예는 돈, 지위, 권력, 그리고 그와 연관되는 인간관계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멸된다. 항상 머물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이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것에 대해 다시 점검해보아야 한다.
오늘도 사람을 만나러 나간다. 너를 만나러 가기 100m 전에 서 있다. 나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경험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쪽이 아닌 것으로도 말이다. 그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두고 너와 나를 연결 짓는 영원한 존재의 바탕에서 헤엄치는 공간이 늘어가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냥 이것이 삶이다.
며칠 사람을 만나며 일어나는 감정을 보았습니다. 참 똑같은 사이클의 반복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진짜 눈이 떠지지 않는다면 이 삶의 과정은 변함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이 떠지기를 기대합니다. 아니, 이미 보고 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나를 인식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친구를 만나러 가기 100m 전 나의 설렘이 나의 기대가 어떻게 곤두박질 칠지 모르는 두려움을 보다가 여러 가지 생각을 펼쳐보았습니다. 친구를 만나서 마냥 행복할까요?(물론 우리가 만나러 가기 전에는 이런 기대를 한껏 품고 가지요.) 아니면 또 다른 반갑지 않은 감정 때문에 힘들어할까요? (당연히 늘 그런 검정들은 좋은 것과 함께 따라오곤 했지요.)
나는 모릅니다. 감정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어나는 감정에 대해 어제와는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나모다의 여정은 어디서 끝이 날까요? 어쩌면 끝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이 자체가 제 삶일 테니까요.
글을 쓰다 보니 <그대를 만나는 곳 100m 전>이라는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의 설렘을 잘 표현한 곡으로 특히 후렴구의 '하늘의 구름이 솜사탕 같다'는 구절이 참 경쾌하여 좋아했던 곡입니다. 이런 싱그러움이 우리들의 만남에서 몹시 그리워지네요. 옥상달빛의 시크한 감성으로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p.s 꽤 오래전에 기록해두었던 글입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나 자신을 보며 글을 기록할 때의 사유를 다시 떠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