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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Aug 06. 2022

아주 긴, 무서운, 아름다운 꿈

연모, 자기를 찾아가는 한 여인의 꿈같은 인생 이야기


   

가끔씩 드라마 폐인廢人도 괜찮습니다.

연모, 이리 사랑스러운 작품이라니! 戀慕합니다.






요즘 상영되고 있는 <이상한변호사우영우> 때문에 처음 알게 된 배우 박은빈 씨에 대한 관심은 결국 연모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드라마 폐인이 되게 했다. 폐인이라 함은 일상의 리듬이 깨어진다는 점인데 싫지만은 않다. 여전히 체력적으로 20회 긴 분량은 자칫 발을 디디기가 두려운데, 배우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살짝 발을 디뎠다가 아뿔싸! 나오는 건 내 맘대로 되지 않아 그냥 포로가 되기로 했다.      


작년에 방영된 작품이고 검색을 해보니 뭐 연말 연기대상에서 상을 싹쓸이 한 작품이고 네000에서도 상당히 좋은 성적을 거둔 걸 보면 이미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터에 나의 호들갑은 뒷북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나같이 우영우 때문에 이 배우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길이가 긴 시리즈물은 아예 환영하지 않는 데다, 정통사극도 현대물도 아닌 어정쩡한 퓨전사극에다 만화 원작이라 더더욱 처음에 몰입이 되지 않았다. 악조건이 겹겹이라 이러다 말 것이라 여겼는데 초반부의 어정쩡함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자연스럽게 극 속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남장여인 역을 소화한 박은빈 씨의 연기에 놀랐다. 주연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중심을 잡고 극을 끌고 가는 힘이 훌륭했다. 남장을 한 세자, 왕의 역할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극 중의 역할에 빙의되어 있었고, 한편 남장 속에 감춰진 여인으로서의 감정도 탁월하게 연기했다. 박은빈 씨의 현대극의 장면도 몇 개 보았는데 이 배우는 과연 몇 개의 얼굴을 가졌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역할 (한 나라의 국부인  왕, 자폐를 앓는 변호사 역뿐 아니라 젊은 여성 역할 등)을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고 다채롭게 펼쳐 보이는 연기의 폭을 가졌다. 기분 좋다. 모처럼 좋아하는 배우가 생겼다.    

  




단순한 궁중 로맨스 넘어 한 편의 인생 서사시      



2021년 10월 11일부터 2021년 12월 14일까지 20회에 걸쳐 방영된 이 드라마는 이소영 씨의 만화 <연모>를 원작으로 한 퓨전 사극 드라마다. 쌍둥이로 태어나 여아라는 이유만으로 버려졌던 아이가 오라비 세손의 죽음으로 남장을 통해 세자가 되면서 벌어지는 비밀스러운 궁중 로맨스라 알려져 있지만, 드라마를 완주하고 나서 드는 인상은 그 이상이다. 단순한 궁중 로맨스 너머 한 편의 인생 대서사시라고나 할까.  만화 원작의 특성상 현실성이 약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군데군데 발견되지만 배우들의 연기, 기존의 틀을 비튼 관계 설정이 주는 신선함, 이야기 전체에서 흐르는 메시지의 따뜻함은 이 드라마가 갖는 아쉬움을 덮을 만하다.

  

이야기는 흔한 권선징악의 구도를 따른다.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도 여기서는 빠지지 않는다. 쌍생아의 탄생! 여아와 한태에 있는 자를 왕자로 삼을 수 없다는 이유로 여아 및 이를 아는 이를 모두 죽이라는 명에 따라 도입부부터 피다바가 되는 어두운 궁궐의 모습은 다가오는 비극을 암시하며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린다.  그 여아가 오라비 세손의 죽음으로 대신 남장을 하여 세자가 되면서 일어나는 극도의 위험천만한 상황 그 안에서의 비밀스러운 사랑이다. 그러나 흔히 부각되는 궁중 로맨스만은 아니다. 좀 더 큰 시야에서 본다면, 운명 속에 던져진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을 찾고자 하는 성장과정의 이야기로 보인다. 물론 선과 악이라는 이중구조가 존재하고 선이 악을 응징하고 승리한다는 구조를 따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해결의 치열한 과정에서 어떤 자는 절대 선으로 어떤 자는 절대 악으로 어떤 자는 그 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기도 한다.    

  

당시 조선시대(가상의 배경, 인물이지만 작품의 배경에 임진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로 추정된다)의 사회적 틀 안에서의 이야기다. 유교가 지배하는 성차별, 계급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를 반영한다. 여아라서 살해당하고, 궁녀라서 하찮은 계급 취급당하고, 중전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원자를 생산하는 것이며, 상궁과 내관의 역할은 오직 왕을 보필하는 것이며, 여인들의 일이란 오직 남자에게 선택되는 것 등 시대의 풍속도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지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비가 활쏘기를 연습하고 실제 결정적인 순간에 활을 쏘고, 남장을 했지만 여인으로서의 삶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 기존의 사대부들의 인식에 저항하는 태도 등이 간간이 보여 틀을 깨고 성장하고자 하는 모습들이 반영되고 있다.      



인물들   

   

상원군으로 표현되는 악이 있고, 김상궁, 홍내관, 현, 가온 등으로 표현되는 선의 손길이 있다. 운명속에 던져진 휘는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대결하고 절망하고 도움의 손길과 함께 험난한 길을 뚫고 나아간다. 휘는 결국 과정에서 벌어지는 너무 많은 희생을 보며 자기 사람들을 더 이상 죽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드라마 속에서 상원군과 함께 독초를 우려낸 차를 마신다. 휘만 살아나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추측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다. 휘는 계급, 신분과 상관없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아끼는 인간에 대한 사랑, 연민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따뜻하다.   


왕자의 입지를 위해 쌍둥이로 태어난 딸아이를 죽이라는 왕의 명에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로서의 혜종, 그리고  가족을 위해 상원군(한기재)의 사람이 되어 살아가지만 결국 자신의 허물에 책임을 느끼고 참회를 행동으로 보이며 변화하는 지훈의 아버지(정석조)는 양심과 현실 사이를 고뇌하는 인간 내면을 잘 표현했다.


가장 인상적인 인물, 김상궁.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떨 때는 깊은 곳에서 눈물이 차오른다. 생명 자체를 거부당할뻔하고 이유도 모른 채 혈혈단신으로 혼자 버려져 어미 없이 살던 아이,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남자로 세자로 살아야 했던 무섭고 힘든 휘에게  어미처럼 옆에서 그를 보좌한 상궁. 그는 어머니, 고향의 현현으로 보였다. 깊은 곳의 감성을 건드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휘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속으로 사랑하며 언제나 곁에서 보호하며 지키는 현의 사랑은 온전히 상대를 아끼는 사랑의 표상이었다. 그의 미소가 참 매력적이었다.  

     


휘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누구나의 인생 이야기      


1. 운명 속에 던져지다

2. 운명의 옷이 무거워지다

3. 운명의 옷을 거부하다

4. 진짜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다      


어찌 계집과 한 태에서 태어난 이를 왕자로 맞이하겠는가?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 왕이 하는 호통이다. 딸아이로 태어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왕자가 될 남아와 한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할 뻔했다. 그게 아니라면 궐에서 공주 신분으로 호사를 누릴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살아있음을 감추어야 해서 혈육을 떠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손에 키워진다. 이 또한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다. 쌍둥이 오빠의 죽음 때문에 얼떨결에 세자 흉내를 내며 이전의 자신이 아닌 남자 세자의 옷을 입고 세자(휘)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이 또한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다.   

   

입혀진 남자의 옷을 입고 휘의 인생을 사는 어린아이(다미)는 힘겨운 나날들을 보낸다. 세자가 되려는 피나는 노력을 한다. 살아내야 하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더 이상 마음 붙일 곳이 없다. 어느새 자기가 세자라고 생각하는 지점까지 이른다. 그러다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난다. 하지만 자신은 그 사랑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여인이 아니라 남자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이 너무 무겁고 힘겹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힘 앞에서 자기 자신으로의 눈뜸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사랑을 만나고 주변의 돕는 손들과 함께 성장해나간다.     

 

바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늘 궁금했는데
이젠 너머의 삶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여기 이대로도 충분히 좋습니다.    
아주 길고 무섭고 아름다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이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이 대사에 집약되어 있는 것 같다. 고통스러웠지만 자기가 아닌 옷을 벗고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된 이 순간이 바로 충분히 좋은 순간이다.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이 꿈과 같다. 무서웠지만 아름답기도 했던 꿈! 실감이 나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이 충분히 좋다고 고백하며 극은 마무리된다. 현실에서 꾸던 꿈이 현실이 되었고, 오히려 지나온 현실의 시간들이 꿈처럼 느껴지는 시간. 앞으로 그녀의 삶은 어떨까? 무서운 일은 없을까? 행복만 기다릴까? 그녀의 이후의 삶이 궁금해졌다. 보통의 조선 여인으로 기개 있게 살아가는 모습이 속편으로 묘사되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져본다. 보통 사람들처럼 일상을 살며 가정을 꾸리며 또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용기를 발휘하면서 말이다. 그것 자체가 이대로 충분히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휘의 성장의 과정에 주변의 돕는 손들이 있었다. 지훈, 김상궁, 홍내관, 호위무사 가온, 그리고 현. 무서운 시간들을 지나 그의 벗들이 걸어오는 저 장면은 아... 제대로 카타르시스가 일어나는 장면이었다. 내가 뽑은 드라마 최고의 장면은 바로 마지막 바닷가 장면이다.    


 

궐을 떠난 휘(다미)와 지훈이 바닷가에서 가온, 현, 홍내관, 김상궁과 재회하는 장면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아쉬움



전형적인 남녀차별 구도에서 여자가 남장을 하는 것 자체가 그 구도에의 균열을 예고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아쉽게도 여자가 왕이 되는 이야기로는 전개되지 못하고 그 시대 안의 여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전체적으로는 기존 사회의 틀안에 머무는 여인의 수동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회에서 스스로 활을 들고 나와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모습에서 한줄기 희망을 보았다. 활쏘기, 검술, 말타기등 남자들이 주로 배우는 것들을 궁에서 이미 익힌 상태라 그의 앞으로의 삶이 당시 시대의 여인상과는 차별화되는 노선을 따를 것 같다. 이제 진짜 자기 삶을 살게 된 이 여인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상상력을 자극하는 지점이다. 일상 속에서  보통사람들이 겪는 삶의 즐거움과 힘겨움을 경험하고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만나고, 갈등하고,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용기를 내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게 될 그 여인의 모습 말이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판타지적인 이야기가 왜 필요한지를 느끼게 되었다. 가상의 이야기가 주는 힘이 있다. 그 힘으로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 보고자 한다. 바닷가에 가면 저 아름다운 부부를 어디선가 만날 것 같다. 그리고 저 멋진 친구들이 멀리서 걸어올 것만 같다.


한줄 평

한 소녀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삶의 이야기. 달달한 로맨스는 덤.






이런저런 생각들로 여전히 연모戀慕에 스며드는 나는 사랑스러운 이 작품 감상을 추천합니다. 단, 길이가 부담스러우니 일상이 조금 무너져도 괜찮은 긴 연휴 때의 시청을 권합니다. 다가오는 추석 연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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