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리는 한가운데 이카루스에게서 답을 찾다? / 십대에게 보내는 편지 9
그리스 로마 신화는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재편집되어 출판되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 이윤기 씨 편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아닌가 싶다. 다양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원전 중의 하나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우리가 궁금한 신들의 이야기가 좀 더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고 역시 이윤기 씨의 번역본이 있다.
뛰어난 건축가이자 발명가인 다이달로스는 크레타섬에 미노스가 다스리는 왕국을 방문한다. 왕의 시녀와의 사이에 이카로스를 낳으며 워낙 좋은 손재주 덕분에 왕의 총애를 받고 지내게 된다. 왕은 왕비 파시파에와 황소 사이에 태어난 괴물 미오나우로스를 가둬놓기 위해 다이달로스에게 미궁 라비리노스를 만들게 했다. 그런데 왕비와 황소 사이의 일을 다이달로스가 방조한 사실이 드러나며 왕의 미움을 사 이카로스와 함께 미궁에 갇히게 된다. (갇히는 이유에 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문제는 다이달로스가 온순하게 갇혀만 지낼 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날아다니는 새를 보고 영감을 얻어 날개를 만들어 탈출 계획을 한다. 결국 깃털과 갈대를 이용하여 밀랍으로 붙여 날개를 만들어 아들과 함께 날개를 달고 비행하게 된다.
성공적으로 탈출하여 크레타섬을 떠나 안전한 곳에 착륙하여 행복하게 살았다고 결론이 나면 좋으련만 이야기꾼들은 결코 그런 결말에 안착하지 않는다. 이카루스는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게 비행하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늘 높이 높이 날아 결국 태양에 깃털을 붙인 밀랍이 녹아 바다에 빠져 죽고 만다. 이카루스의 시신을 묻은 섬을 이카루스의 이름을 따 이카리아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말도 되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로만 가득 찬 신화이지만 지질해 보이는 신들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회자되고 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는 것은 그들 속에 인간의 단상들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대표적인 화가인 마티스와 샤갈은 이카루스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마티스는 이카루스의 비행에, 샤갈은 이카루스의 추락에 초점을 두어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을 그렸다. 각자 다른 그림을 그리듯 이 신화를 대하는 사람마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매일 십대를 대하며 많은 질문을 안고 있던 나는 이 신화에서 나의 질문에 대한 한줄기 실마리를 얻는 듯하다.
오래 강력한 교육기관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다 어느 날 어른이 되어 보니 뭔가 속은 것 같은 뭔가 허무한 것 같은 기분이 든 적 없는가? 나는 그랬다. 모범적인(?) 학생으로 조직의 일원으로 평생을 살며 그것을 자랑스럽게까지 생각했는데 어느 날 교육이라는 틀이 인간을 얼마나 바보처럼 만드는가 하는 자각이 들었을 때의 충격 말이다. 그래서 다시 내가 교육을 하는 교사의 입장이 되었을 때 아이들의 자율성을 인정해주고자 어떤 것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웠다. 교육현장에 있으면서 날마다 질문한다. 가르쳐야 하는가? 그들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어야 하는가? 가르침만 있다면 천방지축 날뛰는 것 같고 강하게 방향을 따라 이끌어주려 하면 개인의 결정권을 침해하는 것 같고 그 중간 지점은 어디일까?
급식을 먹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 공부를 하기 싫다면 “그럴 수도 있지!” 학교에 늦게 온다면 “그럴 수도 있지!”결석을 한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편에 서려고 "그럴 수도 있지" 했더니 그 결과는 아예 매일 급식을 먹지 않고, 수업시간에 엎드러져 자고, 지각을 밥 먹듯 하고, 결석도 일상인 학생들이 속출했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속도를 내며 마음껏 자신의 요구를 주장하고 나선다. 그러면 안돼! 적어도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은 안돼! 왜 안돼요? 내 맘인데... 선생님은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게 내버려주시면 돼요... 설명을 한들 그야말로 잘 안 먹힌다. 윽박지른다고 될 일도 아니다. 딜. 레. 마....
발명 장인匠人 다이달로스는 정성껏 날개를 만든다. 사랑하는 아들과 드디어 탑을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의 도움도 아니라 스스로 만든 세상에서 최초의 날개를 달고 말이다. 얼마나 설레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걱정되었을까? 아직 어린 이카루스는 영문도 모르고 신나기만 하다.
“절대로 너무 높이 날아서는 안된다. 태양에 밀랍이 녹을 거야. 절대로 너무 낮게 날아서도 안된다. 바닷물 때문에 날개가 습기를 먹어 제대로 날 수 없게 될 거야.” 신신당부를 한다. 그것도 몇 번이나. 다이달로스는 아는데 이카루스는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에게 신이 나는 것만이 중요해 보인다.
바로 이 지점이다. 아직 어린 나이에는 전체를 보는 눈이 부족하다. 당연히 개인의 의사가 중요하다. 절대로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세상을 보는 눈이 부족한 시기에는 넓은 안목을 가진, 신뢰할 만한 어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다. 부모, 교사, 또는 신뢰할 만한 스승들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 룰을 잘 지키고 열심히 비행하다 보면 이카루스는 아버지와 함께 좋은 땅에 다다라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아직 어린 십 대들은 어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 태양 가까이 가면 안 되는지 왜 바다 가까이 가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납득하지 못하는 시기에 왜곡된 자기 결정권은 자칫 책임지지 않은 방임으로 이어지고 모두에게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렇다. 그들을 걱정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려는 어른들의 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고 필요하다. 물론 어른이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어른의 말은 옳으니 무조건 따라라 하는 식의 상명하달식의 명령은 안된다.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되, 때로는 따끔하게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줄 어른이 필요하다. 진심으로 사랑으로 이끌려는 어른을 만나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며 열심히 배워야 할 때 배우는 아이들이 필요하다.
사람은 저마다 성장 시기에 따라 할 일이 있다. 어릴 때는 열심히 배워야 한다. 그래야 언젠가 때가 되면 혼자 힘으로 힘차게 날 수 있는 날이 온다. 어디가 위험한지 어디가 안전한지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어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된다.
불행히도 그동안에 너무 어른의 입장에서 강요를 한 부분이 지나친 건 사실이다. 그래서 이제는 판이 완전히 바뀌어 너무 아이들의 개성 아이들의 자유 운운하며 지침 없이 우왕좌왕하는 것도 사실이다. 둘의 균형점을 찾을 수 없을까? 강요가 아닌 가르침,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배움에서 피어나는 건강한 자기 결정. 그런 것을 위해 오늘도 이카루스는 하늘과 바다의 그 중간 지점에서 다이달로스와 함께 비행을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내 입장은 정리가 되는 듯 하지만 아이들은 받아들이기가 좀처럼 힘들다. 물론 모두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꽤 많은 아이들이 그렇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는지는 앞으로의 숙제다.
아이들아!
너희들을 사랑하는 어른들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카루스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카루스, 이카루스여!
다이달로스가 이카루스를 사랑했듯이
이카루스를 섬에 묻으며 비통했듯이
너희들의 안전한 비행을 염원하는 어른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어른들이 변변치 않게 보이는 요즘이다.
광속으로 변하는 세상에 적응 못해 어른들이 쩔쩔매며 위축되기도 한 요즘이다.
그래도, 어른은 필요하다.
이카루스에게 다이달로스가 필요했듯이.
그러니 이카루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