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영웅을 깨우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감동! 感- 같이 느끼고, 動- 마음이 움직인다. 경기 장면은 더 이상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가 되고 순간 우리는 모두 장면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 축구에 빠지길 잘했다. 축구는 감동을 주는 한 편의 스토리가 있는 드라마이자, 영화이자, 예술이자 더 나아가 실제로 삶 속에 일어나는 현실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축구에 빠지길 잘했다.
월드컵 대회의 본질이 사라지고 돈이 있는 자들의 각축전이라는 비난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월드컵이 현대판 전쟁이라는 말도 어느 면에서는 사실이고, 공을 차는 것이 뭐라고 온 세상이 들썩이는 게 이해가 안 되는 사람도 많은 것이 사실이고, 공을 잘 차는 선수들이 이름을 알리고 그들의 성취에 따라 몸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도 사실이고, 그 많은 돈이 축구에 쏠리는 편파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많은 부정적인 요소와 비난받을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각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들의 움직임이 골방에 있는 한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그런 면에서 중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신화학자 조셉 캡벨은 인간의 삶을 영웅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자신이 있던 터를 떠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고 그 과정에서 적을 만나고 적과의 대결을 거쳐 적을 처단하고 다시 자기 세계로 돌아와서 동료들의 삶을 구원하는 이야기. 어떻게 보면 사람 사는 모든 이야기는 이 사이클을 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영웅을 갈망한다. 어려서부터 들어온 영웅의 이야기는 삶 전체를 지배한다. 영웅을 본받으려 하고 삶 속에서 영웅의 삶을 살아내고자 한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영웅이라는 점에 있다. 밖에서 영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바로 그 영웅의 삶을 살 수 있고 살아야 된다는 점이다.
축구에 열광하는 것은 그 축구 현장에 내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달리는 선수와 함께 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패배는 쓰라리고 승리는 통쾌하다.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 일어나기 힘든 일이 일어났을 때 그 희열은 증폭된다. 현실의 실패를 보상받는 느낌이 든다.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된다. 그것은 거의 신비에 가깝다.
침착해야 합니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 전반전에서 반드시 골을 넣으려고 서두르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흐름이 상대에게 빼앗겼다면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전반 5분 만에 선제골을 먹히고 기가 죽을 법도 하지만 여전히 점유율을 높게 가져가던 우리 선수들은 결국 코너킥 세트피스 상황에서 김영권의 헤딩으로 동점골을 터뜨린다. 다시 시작해볼 수 있겠다. 감독이 퇴장당해 관중석에 있고, 손흥민은 상대의 밀착 압박으로 좀처럼 공격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위협적인 호나우두도 이전만큼 힘을 쓰지 못하고 이강민이 선발로 뛰는 새로운 전술로 상대 선수들을 압박하며 희망의 전조가 보이기도 한다. 골키퍼의 선방, 그리고 수비수의 선방이 부각되고 있는 시간, 상대의 공격이 거세어져서 우리 측 골문이 위태롭기가 반복되는 시간에 심장은 두근거린다. 빨리 전반전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일단 흐름을 끊어야겠다. 비기기만 해도 좋겠다...
우리 시간으로 자정에 시작해 진행되는 축구 경기. 거리는 조용해졌고 여기저기 모여 경기 관람의 흥분을 나누고 있는 시간. 포르투갈이 우리의 적이 아닌데 우리는 가상의 적을 만들고 전쟁 같은 축구를 한다. 축구를 현대판 전쟁이라 했던가? 무력충돌은 없어졌으나 인간의 승부근성은 스포츠로 표현되었다고 했던가? 국가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은 그 순간 어느 특정 개인이 아니게 된다. 국가에 속하는 모든 개인 개인을 대표한다. 다시 말해 그 국가에 속한 각 사람이 그 선수인 셈이다. 대한민국과 포르투갈이 겨룬다. 상대를 이겨야 한다. 경기장을 벗어나면 다시 악수하고 포옹하고 맥주잔도 기울일 수 있는 친구가 되지만 경기장 안에서는 상대는 나의 적이다. 너로 상정된 가상의 팀을 만들어 대결하고 승패를 나누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형태의 적, 우리를 압박하고 무력하게 하는 어떤 상황, 사람, 사건과 겨루는 우리의 모습을 형상화한 모습이다.
흥분할 필요 없습니다. 아직 45분이 남아 있습니다.
냉정하기 그지없던 승리의 여신은 조별 예선 3차전에 우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포르투갈을 상대로 이기는 것도 기적인데, 같은 조의 다른 팀의 경기 결과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끝이 나며 승점 4점으로 조 2위로 16강 진출 확정되었다. 후반 추가시간 6분에 터진 골, 그리고 승리의 함성, 초조하게 다른 팀들의 결과를 기다리며 우리 팀의 진출이 확정될 때의 한호 장면은 몇 번을 봐도 눈물이 난다. 잠을 잘 수 없다. 오늘은 잠을 잘 수 없어. 어떻게 잠을 자?
열광의 도가니. 믿기지 않는다. 우리를 이긴 가나도, 가나를 이긴 우루과이도 아닌 대한민국이 조 2위로 16강 진출이다. 그야말로 1위 팀인 포르투갈을 이겼다. 후반전 황의찬이 투입되며 저돌적으로 공격하는 모습이 보인다. 결국 손흥민의 영리한 돌파와 정확한 패스를 받는 황의찬이 정확하게 골문을 흔들었다. 그렇다. 승리의 여신이 비켜갈 때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승리의 여신은 찾아온다.
흥분되어 잠을 잘 수가 없다. 아직도 붉은 악마의 함성은 화면을 타고 흘러나온다. 기적이 일어났다. 승리의 여신이 드디어 우리에게 입을 맞추었다. 기쁜 밤이다. 오늘은 잠을 자지 않을 것이다. 맘껏 축하할 것이다. 그대들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 우리의 승리는 그대들의 승리! 비로소 환하게 웃는 선수, 눈물 흘리는 선수, 드디어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감정을 쏟아내는 선수들!! 정말 멋지다!!
우루과이전에서의 무승부도 가나전에서의 패배도 그것은 더 이상 패배가 아니었다. 우승후보와 맞서 기죽지 않고 당당히 싸워 골문을 지켜냈고, 결과적으로 패배를 했으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그 자세만으로 충분히 이미 이긴 경기였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3차전 포르투갈전에서의 극적인 승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거의 기대를 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일궈낸 연장 6분의 시간에 들어간 결정 골의 장면은 우리를 모두 흥분의 도가니에 집어넣었다.
영웅들의 이야기를 보며 우리가 지금도 눈물을 흘리는 것은 내 안에 영웅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축구는 현실이다. 축구를 보며 나는 나의 삶을 생각한다. 골이 먹히고, 행운의 여신이 손을 잡아 주지 않고, 태클당하고, 헛발질을 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골문을 향해 달리는 것,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팀과 하나가 되는 것,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상대의 공격을 막는 것, 그것이면 된다.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승리의 여신은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날이 온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축구가 한낮 취미에 그치겠는가? 한낱 공놀이겠는가? 축구에 빠질 이유가 충분하다. 축구장에서 벌어지는 한판 전쟁은 내게 말을 걸어온다.
포기하지 마!
팀과 함께 해!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해!
어떤 강의보다, 어떤 책 보다, 어떤 이야기보다 짜릿한 감동을 준 월드컵 조별 리그전의 태극전사들. 감사합니다. 당신들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그대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았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 삶의 영웅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각 나라를 대표하여 뛰는 모든 나라들의 선수들 역시 응원합니다. 승패를 떠나 우리는 모든 경기에서 진한 이야기를 보고 있습니다. 모두 다치지 말고 공정한 플레이로 삶에 지친 우리들에게 멋진 영웅의 이야기를 보여주십시오.
지금도 달리는 우리, 나도 당신도 멋진 영웅입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