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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Apr 08. 2023

냉장고 선생님을 추억함

가까이하기엔 너무 추운 당신 

 

학창 시절에 특성을 가진 학생이나 선생님은 별명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유독 선생님들의 경우는 악명 높은 선생님들에게 영광스러운(?) 별명이 붙기 마련이다. 대부분 아주 엄하거나 무서운 선생님의 별명은 각 학교를 대표하기도 한다.      


냉장고 선생님 


요즘에는 중학교, 고등학교 할 것 없이 여교사로 넘쳐 나지만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여교사는 흔하지 않았다. 게다 여학교인 경우 학생들의 관심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 선생님들이었으니 여교사에게 별명이 돌아갈 기회는 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유독 별명이 기억되는 여자 선생님이 한 분 계시다. 바로 고3 때 담임선생님이셨다. 세계사를 담당하셨고 한국의 최고 명문대학 S대학 출신의 재원이셨다. 단아한 몸집에 다부진 말투는 빈틈을 불허하셨고 외우기 어려운 복잡한 연도와 함께 복잡한 세계의 역사를 지도를 그리며 열심히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빈틈이 없다 보니 반장이었던 나조차 선생님을 자주 접하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에게 친밀감이 들지 않았다. 그분 앞에만 서면 몸이 얼어버려서, 찬바람이 쌩쌩 불어서 그만 그분의 별명은 냉장고가 되어 버렸다. 생각해 보니 얼음 땡 효과라면 냉장고보다는 냉동고가 어울릴 법 하지만 당시로서는 냉동고를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학생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단어로 냉장고가 적격이었다. 


여하튼, 냉장고 선생님 덕분에 나는 세계사를 싫어했다. 충실한 수업에도 불구하고 별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별 내용 없이 스멀쩍 지도 한 장 그려놓고 허접한 이야기 풀어내는 0풍 선생님의 국사시간에는 오히려 눈을 반짝하고 듣기는 했지만 말이다. 0풍은 워낙 실속 없이 풍이 심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0은 성씨에 해당한다. 생각해보니 학생들이 별명을 기가막히게 지은 것 같다.) 과목의 특성보다 가르치는 선생님의 특성이 학생들이 흥미를 갖느냐 못 갖느냐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 있었다.  


졸업, 그리고 재상봉再相逢


불명예스럽게도 냉장고라는 별명을 얻게 된 선생님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셨고 늘 차가운 분이셨다. 가까이 가기에는 너무 추운 당신! 이 또한 우리의 선입견 내지 착각이었겠지만. 그렇게 냉장고 선생님과의 한 해를 보내고 우리는 졸업을 했고 졸업을 한 지 25년 만에 모교를 방문하는 재상봉행사가 열렸다. 학교에 다닐 때 우리의 우상이며 별이기도 했던 많은 남자 선생님들은 이전의 그 매력적인 젊은 분들이 아니셨다.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는 분도 계셨고 건강 문제로 나오지 못한 분들도 계셨고 다행히 연락이 닿아 행사에 참여한 분도 계셨지만 우리가 세월을 비켜갈 수 없었듯 그분들은 더 민감하게 세월 앞에 계셨던 것 같다.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선생님들이 지금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시릴정도로 고마운 생각이 든다. 나는 직장에 연가를 내고 1박 일정으로 재상봉 행사에 참여했고, 타지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학교에서는 생활관을 숙소로 제공해 주었다. 학교 체육관에서 한참 어린 후배들과 전설의 선배들이 함께 게임도 하고, 교사와 학생들도 마련된 프로그램을 즐기며 다시 그 이전의 시간 속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런저런 시름을 다 잊고 철없던 시절로 돌아간 아줌마들은 호호깔깔 여고생이 되어 학교에서의 재상봉 시간을 즐겼다.  


반장! 우리, 선생님 댁에 찾아갈까? 연락해 봐! 


긴 시간이 지나도 이름 대신 반장으로 호명되는 내게 미션이 주어졌다. 우리의 담임 선생님이 학교 행사에 참석하지 않으셔서 못내 서운했던 우리들은 이전의 야리야리한 소녀들이 아니었다. 아이 키우며 육해공군 가리지 않은 전투에 그리고 온갖 세파에 휩쓸리며 무서울게 없어진 아줌마들은 감히 냉장고 선생님을 방문할 용기를 냈다. 다음날 나는 선생님과 연락이 닿아 몇몇 친구들과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뵙게 된 선생님은 더 이상 냉장고가 아니었다. 온화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하며 제자들이 찾아왔다고 과일과 차를 내어 주시며 이런저런 안부를 물어주셨다. 내 기억에 선생님은 은퇴하시고 집에서 쉬시는 것 같았다. 이전의 당당함을 뒤로하고 여느 아낙처럼 보이는 선생님은 훨씬 편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따뜻한 


나는 어쩌다 공백을 딛고 다시 학교에서 아이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생각해 보니, 왜 선생님이 냉장고처럼 행동하셨는지 이해가 되는 구석이 있다. 선생님 자신의 성격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대학 입시를 앞둔 고3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는지도 모른다. 관대함과 단호함 그 사이에서 선생님이 선택한 위치가 바로 냉장고가 아니었을까? 나 역시 지금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아이들과 씨름을 하고 있기에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래도 아쉽다. 냉장고가 아니셨다면 내가 그 당시에 세계사를 좀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 진작에 역사 공부를 하고 관련한 책도 좀 많이 읽었더라면 내가 좀 더 지혜로워지지 않았을까? 아쉬움 너머 그래도 진하게 냉장고와 함께 떠오르는 선생님을 추억하니 뭉글뭉글 올라오는 감정은 미안함이다. 선생님이 냉장고가 된 이유가 무엇이든, 당시로서는 선생님을 다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었으니, 충분히 감사하지 못했고 충분히 선생님과 따뜻한 만남을 가져보지 못했다. 어렸고 몰랐다. 늘 그렇게 사랑은 아래로 흐르는 것이라 어린 사람들이 윗 세대를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내가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느끼는 허기, 갈증을 선생님도 고스란히 떠안고 지내셨으리라. 비로소 나도 머리가 희끗희끗해져 은퇴하셨던 선생님의 그 연령과 비슷해진 때가  되었다. 이제야 나는 선생님께 질문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님! 선생님 별명 아세요? 

내 별명이 뭔데? 

냉장고였어요. 샘 앞에만 가면 얼마나 무서웠게요? 

내가? 난 늘 웃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다 괜찮습니다. 냉장고이셨어도요. 그동안 살아온 게 내가 잘나 이만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좀 더 살아보니 다 나를 도운 분들의 도움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요. 한동안 연락이 끊어졌는데 지금쯤 어디 계신가요? 어디라도 계신다면.....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늦은 인사를 보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갑니다. 

4월의 주제는 <냉장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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