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제품은 한 번 사면 꽤 오랫동안 사용하는 물건이다. 적어도 10년 정도는 거뜬히 사용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물건 하나하나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오늘은 냉장고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을 꺼내어 보려 한다. 냉장고 문을 열며 지금이 아닌 어느 때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한여름 낮에 태양이 내리쬐는 열기를 머금고, 이글이글 불타는 아스팔트를 걸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시절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그렇게 사자고 졸랐건만, 구두쇠 아버지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돈도 돈이지만, 아버지는 에어컨에서 나오는 인위적인 차가움을 싫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걷는 내내 뜨거움을 흡수하느라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냉장고가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가 문을 덜컥 열어젖히고 뜨거운 열기를 식힌다. 닫을라치면 숨결 같은 불쾌한 공기가 곧바로 내 몸에 달라붙기 때문에 쉽사리 문을 닫지 못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더더더... 그러면 어디선가 찰싹! "뭐 하는 짓이고? 빨리 문 안 닫나!!!" 엄마의 등짝 스매싱이 날아온다. 의외로 싸늘해서 나쁘지 않다. "하하. 그렇게 덥나? 이리 오너라. 부채질해줄께." 활짝 웃으며 부채를 들고 걸어오던 아버지 모습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나에게 냉장고는 음식을 저장하는 기능 외에 한 가지 기능이 더 있었다. 내 안의 모든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는 고마운 친구였으니 말이다. 더위든, 분노든 구분 없이 화가 가득 들어차면 그 열기를 식히기 위해 항상 냉장고 문을 열었다. 머리부터 스며드는 찬 기운에 한껏 달궈진 뜨거운 기운을 몰아낸다. 나에게 냉장고는 차가움을 되찾기 위한 '냉정고'이기도 했다.
냉장고에서 원하는 만큼의 차가움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 안에 들어있던 얼음을 꺼내어 와작와작 부수어먹기도 했다. 지금은 얼음을 깨어먹기엔 이가 시리고, 추위를 많이 타서 이젠 에어컨이 있어도 잘 틀지 않을뿐더러, 음식 할 때 아니고선 좀처럼 냉장고 문을 열지도 않는다. 하지만 열기를 식히던 그 습관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잔뜩 열받은 날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발걸음이 냉장고로 향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나를 급하게 식혀야 하는 순간마다 냉정과 이성을 되찾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연다. 그런데 그 습관을 아이에게도 물려줬나 보다. 아들도 수시로 냉장고 문을 열어젖힌다.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어보는데, 뜻하지 않게도 울컥 뜨거움이 올라오는 것 같다. 어느 한순간의 풍경이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져서 인 가 보다. 더는 내 곁에 머물 수 없는 사람, 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의 페이지를 열어 보면 시간도 계절도 무색하게 그리움이 몰려든다. 뜨거웠던 그 시절의 온도가 시간의 틈새에 짙게 배어 있다. 글을 쓰며 홀로 추억하는 날이면 손끝까지 아득하게 번진다. 아무래도 냉장고 문을 열어야 할 타이밍인가 보다. 시원한 냉장고 바람에 울컥 올라왔던 그리움을 식혀야겠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냉장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