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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Apr 07. 2023

그 남자와 그 여자의 냉장고 정리

여보, 정리는 테트리스가 아니야

한 남자가 있다. 날 너무 사랑하는. 이 남자에게 모든 물건은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이 남자는 새로운 물건이 생기면 그 물건의 형태를 보고 자리를 지정한다. 크기, 모양, 부피, 무게 등을 고려해서 그 물건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 둔다. 나는 그 물건의 쓰임과 쓰이는 빈도 등은 고려하지 않는 그가 이해 안 된다.


이 남자가 정리한 팬트리에는 물티슈와 칫솔과 주방세제가 한 바구니에 있다. 어차피 포장도 안 뜯은 새 물건들이니까 같이 있어도 된다는 이 남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바구니에서 물건을 꺼내 분류했다. 욕실에서 쓰는 물건은 욕실에서 쓰는 물건끼리, 주방에서 쓰는 물건은 주방에서 쓰는 물건끼리 정리해 놓으니 속이 다 시원했다.


이 남자가 꽉꽉 채워놓은 바구니를 보며 이 남자에게 정리란 테트리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빈틈이 생기지 않게 물건을 이리 돌리고 저리 구겨서 잘도 넣어놨다. 테트리스에서 블록이 한 줄을 다 채우면 사라지는 것처럼 이렇게 잘 채운 물건도 기억에서 사라지곤 한다. 아무 기준 없이 바구니를 가득 채웠으니 밑바닥에 뭐가 있었는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가끔 큰맘 먹고 정리하려고 바구니를 뒤집으면 뜻밖에 추억 여행을 떠나게 되기도 한다. 언제 산 물건인데 아직도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냉장고를 이런 식으로 정리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칫솔은 기억에서 사라졌다가 찾아도 쓸 수 있지만 냉장고에는 기억에서 사라지면 처참한 꼴을 보이는 것들이 많다. 큰 김치통 뒤에 숨어있다 한 달 뒤에 발견된 방울토마토라던가, 오이 밑에 깔려 한참을 못 찾아 더 이상 가지라고 부를 수 없게 된 '가지였던 것'같은 것들을 발견하면 입에서 저절로 "으윽"소리가 나면서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냉장고는 팬트리보다 더 잘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냉장고를 정리하면서 남편과 더 자주 충돌한다.


냉장고 정리에서도 남편과 내가 자주 충돌하는 부분은 '분류'다. 냉장고에 칸이 괜히 나뉜 게 아니다, 김치는 김치끼리 채소는 채소끼리 두되 자주 꺼내야 하거나 일찍 먹어야 하는 것들은 꺼내기 쉽고 잘 보이는 곳에 두라는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냉장고를 정리하다 보면 냉장고에서 충돌하는 지점이 '분류'만은 아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5개씩 비닐로 묶어서 파는 요구르트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에서 우리는 또 부딪힌다. 남편은 비닐 포장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두고 살짝 찢어서 하나씩 꺼내어 먹는다. 비닐은 마지막 요구르트를 꺼낼 때 함께 꺼내 버린다. 나는 넣기 전에 비닐 포장을 뜯어서 버리고 하나하나 넣는다. 어차피 꺼내 먹어야 하는데 꺼내기 쉽게 비닐 포장을 뜯고 넣는 게 좋다는 나와, 비닐 포장을 미리 뜯든 먹을 때 뜯는 결국 뜯는 건 똑같은데 왜 미리 뜯어야 하냐는 남편의 첨예한 토론은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났다. 대신 나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정리는 내가 하자. 그냥 내가 하자. 그게 제일 편하다.


요즘 남편은 제로 음료에 빠졌다. 한참 펩시 제로 라임 맛에 빠져 살더니 이제 웰치 제로, 맥콜 제로도 쟁여두었다. 남편이 주문한 캔음료들은 6개씩 비닐로 묶인 채로 4묶음이 한 박스에 담겨 온다. 남편은 그 4묶음을, 그러니까 24캔을 모두 냉장고에 넣었다. 나는  남편이 출근한 틈에 3묶음을 꺼내 팬트리에 넣고 한 묶음만 비닐 포장을 뜯어 냉장고에 정리했다. 남편이 음료를 마시면 나는 다음 날 아침에 남편이 마신 만큼 다시 채워 넣는다. 매일 시원한 음료가 냉장고에 줄 서 있으니 남편도 굉장히 만족하는 눈치다. 그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는 게 너무 좋아서 다음 날 또 음료를 채워 넣는다. 남편은 아들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손이 많이 가는데 키우는 재미가 있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냉장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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