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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Apr 05. 2023

일체유심조

같은 길 다른 마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화엄경의 중심사상으로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있다는 것을 일컫는다. 이 말은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 물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역이었던 출근길을 즐기고 있는 나를 보며 드는 단상이다.  

 

출근길이 즐거워 

   

꽃들의 화려한 등장을 시새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봄비가 내리고 있다. 3월과 4월의 차이가 뭐라고 이렇게 기온이 다를 수 있나 싶게 낮에는 꽤 더워 반팔차림을 심심찮게 목격했다. 동면을 깨우며 생명을 움틔우던 봄의 전령들은 서로 시새움을 타는 것인지 그들의 등장은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쑥! 뽁! 뽀자작! 뽕! 까꿍! 화알짝! 그 어떤 언어로 그들의 속삭임을 표현해 낼 것인가? 어디 자연만 그런가? 새롭게 시작하는 만물과 더불어 새로운 분기, 학년, 시기를 여는 사람들의 움직임도 부산하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어지로운 공기는 그냥 이대로 있다가는 폭발해 버릴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찾아왔다. 봄비! 


반갑다 봄비야. 그래 네가 올 때가 된 것이지. 네가 와서 한바탕 정리를 해 주어야 하지. 

   

여느 때처럼 모닝커피를 내리고 보온병에 넣는 것은 내 아침마다의 리추얼이다. 아무리 피곤하고, 내키지 않는 일이 눈앞에 있어도 습관처럼 익숙해진 내 몸놀림은 모든 저항을 밀어낸다. 커피메이커 앞에 서면 자동적으로 내 하루는 사사삭 열리게 된다. 부지런하게 손놀림이 빨라진다. 이것저것을 준비하고 정리하고 바깥세상으로의 진출을 위해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그날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나는, 마치 성전에 들어가듯 조용히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 정성스럽게 신고 조용히 문을 닫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출발한다. 


물소리는 늘 기분이 좋다. 그래서 나는 빗소리가 좋다. 도로의 물에 스치는 자동차의 바퀴소리도 좋다. 시동을 걸고 핸들을 움직이며 스르르 미끄러지는 자동차의 움직임도 기분이 좋다. 오늘은 어떤 세상이 내 앞에 펼쳐질까? 예측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일들 앞에 심장이 쪼그라들 때도 있지만 적어도 운전하며 달리는 그 시간엔 홀짝홀짝 마시는 커피와 음악의 선율에 집중하려 한다. 오늘따라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수묵화처럼 그윽하다. 멀어질수록 산들은 손으로 쓱 문질러 색을 칠한 것처럼 몽환적이고 가까운 곳에 보이는 봄꽃들은 최후의 호흡을 내쉬며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 길은 괴로워 


직장까지는 평균 거의 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먼 거리이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출근하는 나는 고속도로를 달려야 하는 부담이 있고, 출퇴근 시간의 체증은 부담스러워 아예 여유 있게 일찍 출발해야 한다. 장거리 주유비와 매일매일의 톨게이트비만 합쳐도 비용이 꽤 나간다. 길고, 오랜 시간과 돈이 드는 출근을 할 만큼 내가 하는 일은 즐거운 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신인류이고, 업무는 쉴 새 없이 쌓인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하루가 지나가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면 나의 일상이라는 것은 거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밑지는 장사 같다. 어쩌다 들어선 이 길을 중도에 포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수도 없이 고민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디 끌려가는 가축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당연히 출근길은 유쾌하지 못하다. 고속도로에서 만나는 거리의 풍경도 별다른 게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차량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산과 뜨는 태양도 아무 감흥 없이 보인다. 끊임없이 자기 세뇌를 하며 액셀을 밟고 간다. 


생각을 바꾸니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나의 하루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바뀐 건 없다. 아이들은 여전히 신인류이고, 끊임없이 열이 오르게 하고, 때로는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고, 나도 덩달아 짐승처럼 돌변하기도 하고, 아직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업무들이 잠시를 앉아 있게 못하고, 잠시라도 정신줄을 놓으면 어디선가 펑펑 구멍이 나는 소리가 들리고, 교실에만 들어가면 여기저기 동시다발 아우성 소리가 들리고....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화가 나기도, 무력하기도, 절망스럽기도 하지만 그런 와중에 나는 커피를 내릴 수 있어서, 신발을 신고 일하러 갈 수 있어서, 이해할 수 없지만 귀여운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서, 함께 힘겨움을 공감할 수 있는 동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할 일이 있어서, 도전을 받고 성취할 수 있어서, 실수하고 수정할 수 있어서,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무엇보다 살아 있어서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즐기기로 했다. 커피맛을 느끼고, 출근길에 듣는 음악에 심취하고, 거리의 풍경을 음미한다. 같은 길인데 다른 장면들이 연출된다. 한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출근길을 즐기다 보니 어떨 때는 벌써 도착했나 할 정도로 금세 도착하고 만다. 더 고역이었던 퇴근길도 견딜만해졌다. 조금이라도 퇴근이 늦어지면 고속도로의 정체로 퇴근시간이 무한정 길어졌다. 요령이 생긴 후부터는 가능한 한 퇴근시간이 늦어지지 않도록 시간 안에 일을 마무리하려 노력한다. 적응되니 이제는 퇴근시간의 피곤함도 훨씬 줄어들었다. 견디다 보니 길이 보인다. 출근 시간도 퇴근 시간도 지낼만하다. 여유와 함께 즐기게 된다. 같은 길인데 다른 풍경들이 보인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다. 나의 출퇴근 시간이 그러하듯,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나는 이것을 절감하고 있다.  생각으로 짐을 껴안고 살지 않으려 하니 마음을 가볍게 하니 몸도 가볍다. 전쟁 같은 3월을 지나고 4월을 맞이하는 내게 이 비는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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