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과 용서 그 사이에서

더 글로리 단상 2

by 나모다


시리즈물로 제작되어 장안의 화제를 뿌렸던 한국영화 더 글로리는 요즘 시대의 민감한 이슈를 건드려 공감과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였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학교폭력문제가 사회문제로 제기되긴 했으나 적절한 해결책 없이 대부분은 피해자가 고발하지 않게 되는 구조의 한계 속에 있었다. 작가는 다루기 까다로운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며 통쾌한 응징과 처벌로 답답했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당연히 공전의 히트를 쳤고 출연한 배우들의 몸값은 올랐고 굵직한 영화제에서 상을 거머쥐고 있다.


죄를 저지른 사람을 처벌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보는 각도에 따라 사건의 정황에 따라 다양한 해법이 나올 터이지만 적어도 사회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법이 처벌을 담당하고 있다. 법 관련 전문가들이 공평하게 사안을 파악하고 처벌을 내려주고 억울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기대하지만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권력이나 돈이 그 공정성을 가로막아 자주 솜방망이 처벌이 되다 보니, 힘도 뒷배경도 없는 약자들은 늘 울분을 삼켜야 한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처벌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억울한데 현실을 알기나 하는지 종교라는 카테고리 속의 계율들은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를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무슨 가당찮은 말인가!


동태복수


삶의 근본을 다룬다고 하는 종교에서의 황금률은 대부분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을 상대에게 하지 말라’는데 일치한다. 또한 잘못에 대해서는 적절한 기준에 따라 보상을 하도록 한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 196조에는 “사람이 높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면 제 눈을 멀게 할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법전 200조에는 “사람이 제 계급 사람의 이를 부러트리면 제 이를 부러트릴지니라”라고 되어 있다. 구약 성경에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규정을 적용하여 똑같은 무게로 갚아 주라는 동태복수를 명하고 있다. 처벌을 하라는 쪽에 무게를 둔다. 하지만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기독교에서는 구약식의 규정을 넘어서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한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원수를 사랑하시오


“원수를 사랑하시오.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며 헐뜯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시오. 뺨을 대리는 사람에게는 다른 편 뺨마저 내밀고,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마시오.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한테서는 되찾으려 하지 마시오. 사람들이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똑같이 사람들에게 해 주시오. (누가복음 6.27-31)


보통 사람으로서는 가능하지 않다. 혹 겉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척할 수는 있겠지만 내 주변에서만도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하기까지 하는 걸 본 적은 없다. 왜 이런 불가능한 명령을 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본회퍼의 행동이 오히려 공감이 간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히틀러의 만행에 분개하며 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다 감옥에 갇혀 결국 감옥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독실한 신학자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그는 용서보다는 처벌을 선택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종교적 교리 앞에서 그는 어떤 항변을 할 수 있는가?




팔복 혹은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유명한 구절이 있다

복되도다,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대들 것이니.
복되도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배부르게 되리니.
복되도다, 지금 우는 사람들!
웃게 되리니.
그러나 불행하도다, 당신네 부유한 사람들!
스스로 받을 위로를 받고 있으니.
불행하도다, 지금 배부른 사람들!
굶주리게 되리니.
불행하도다, 지금 웃는 사람들!
슬퍼하며 울게 되리니.

누가복음 6. 20-25


같은 에피소드를 서술하는 방법은 복음서마다 다르다. 심지어 같은 관점에서 쓰였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도 같은 에피소드를 기술하는 방법, 시간, 순서, 내용등에 차이가 있는 경우를 많이 목격하게 된다. 공동체별로 자신의 공동체의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부각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서술방법은 다르다. 그렇다고 그것을 거짓이라고 할 것인가? 팔복八福구절도 마태복음은 산 위에서 설교를 하였다고 하여 산상수훈이라고 하지만 누가복음 6절에 기술된 팔복八福은 평지에서 설법을 전했다고 한다.


예수께서 그들과 더불어 평지로 내려와 계시니 수많은 제자가 큰 떼를 짓고 또한 온 유대와 예루살렘, 그리고 띠로 시돈 해안지방에서 모여 온 백성이 많은 무리를 이루었다.

누가복음 6.17


이 부분과 관련하여 전 서강대 종교학과 서명원 교수는 산과 평지가 갖는 의미를 해설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산 위에서 영광의 형체로 변화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강했다면, 누가복음의 팔복八福은 평지로 내려와 평등한 관계 즉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평등한 관계라 함은, 더 이상 종이 아니고 벗으로 친구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신적 존재와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측면이다. 이런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무엇을 강조하려는가 하는 의도에 따라 서술의 방식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라든가,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라라는 식의 내용도 문자 그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맥락에 따라 정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십니다.

누가복음 6.25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뒷부분에 거론되는 이 구절에서 악인 선인 가리지 않고 품는 절대자의 인자함이 눈에 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절대자의 인자함을 본받으라는 요청과 닿아 있다. 결국 악인도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본다면 히틀러까지도 절대자의 인자함 안에 있다는 말로 들린다. 인자함, 자비는 지향해야 할 우리 삶의 방향성이다.



내 힘으로 안 되는 용서


그동안 문자 하나하나에 매이며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었는데 비유로 가득한 성경을 다른 각도에서 보니 오래동안의 숙제가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본 회퍼의 선택이 혹 다른 선택이었더라도 절대자의 인자는 여전할 것이다. 그렇다면 본회퍼가 살해에 가담했느냐 가담하지 않았느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죄인에 대해 사회적인 실제적인 처벌을 할 것이냐 하는 것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경우의 수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법으로 규제로 강력하게 단속해야 하는 다양한 사회적인 문제들을 보며 무력한 경우가 많다. 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어 범죄는 진화하고 있다. 강력한 처벌을 해도 모자랄 판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종교적 교리가 이 현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상식을 벗어난 듯한 이 명령은 실제로 어떤 의미일까? 과연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인가? 모든 자에게 인자를 베푸는 절대자의 사랑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어떤 분이 이런 고백을 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자연스레 용서하게 되었어요.

나는 그 말에서 한줄기 빛을 보았다. 억지로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 어떤 경로로 용서가 되는 때가 온다. 용서하지 않으면서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용서하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야 고집하는 것은 교만이며 아집이다.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알겠는가! 응징과 처벌을 원한다면 솔직하게 응징을 원한다고 고백하는 것도 괜찮다. 또한 지금은 용서할 수 없지만 용서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는 소망을 열어놓는 것도 괜찮을 법하다.


사회법의 시행은 사회가 주체가 되면 된다. 건강한 사회라면 공정함의 정도가 높을 것이다. 공정한 사회를 바라는 이유는 모두의 평화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회가 기능을 상실할 때 개인은 당황하고 무력해진다. 그래서 우선은 사회가 건강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회의 기능은 별도로 하더라도,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용서 또한 개개인마다 다른 판결이 가능할 듯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용서.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라,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는 어마무시한 규율을 억지로 흉내 낼 필요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 양말 한 켤레라면 그것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진실 그것이면 된다.


<더글로리>의 학교폭력 피해자 동은은 사회와 학교가 담당해주지 못했던 복수를 선택했고, 주여정의 복수까지 돕기로 선택했다. 사회가 처벌해주지 않아 스스로 처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여 선택한 길이다. 복수가 다 끝나고 그들에게 용서라는 길이 또 열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치유와 삶을 위한 길의 선택은 각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더 글로리 2>가 혹 만들어진다면 정말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최근 이 작품이 또 상을 수상했기에 묻어둔 글이 생각났습니다. 꽤 이전에 작성해 두고 손을 좀 볼 생각이었는데 거기까지 힘이 닿지 않아 작성된 대로 발행합니다. 생각은 늘 변하고 그와 함께 글도 변하리라 여깁니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의 저의 단편적인 생각 정도로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봄에 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