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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Aug 28. 2023

알맹이 없는 호두껍질

위선과 예의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사회를 살면서 가끔씩 아니 자주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다. 마음은 내키지 않는데 예의 때문에 참석을 해야 하거나, 그들의 감정에 동참하는 경우들 말이다. 물론 함께 공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경우들을 만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시대의 풍속 속에 있으면서 본질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한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장     



예수 당시의 비판 대상의 대표였던 바리사이들은 경건한 종교인으로 유대사회의 존경을 받는 상위계층이었다. 물질과 정신의 모든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특별히 악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요즘 상황으로 대비한다면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였을 것이다.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존경과 현실의 복을 동시에 누리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굳이 종교가 아니어도, 정치든, 학문이든, 경제든 어떤 분야의 지도자로 존경과 부를 동시에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얻고 싶어 하는 두 가지를 다 가진 사람들 말이다. 만약 예수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면 현시대를 보며 어떤 이야기를 할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정치지도자들이여!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학자들이여!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경제인들이여! '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을까?      


위선자라는 질책을 당할 사람은 과연 이런 지도자들뿐일까? 당연, 지도자는 더 큰 책임이 있으므로 대표적으로 거론이 되었겠지만, (그래서 지도자는 아무나 해서는 안된다.) 우리 같은 보통사람도 이 질책을 면할 수 없는 면이 많다. 쇼펜하우어는 일상의 자리 즉, 기쁨의 자리 (축하연), 슬픔의 자리 (장례식), 지혜의 자리 (학술모임)에서의 겉모습 즉 위선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화려하게 보이는 겉모습에서 진짜 기쁨, 슬픔, 지혜를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하며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속 빈 호두와 같다고 일갈한다.  

    

유익한 통찰을 얻는 것이 특히 어려운 이유는 위선 때문이다. 젊은이에게 이러한 위선의 가면을 일찍 벗겨 보여주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화려한 것은 무대 장식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겉모습에 불과하고, 사물의 본질이 결여되어 있다... 슬픔도 기쁨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 긴 장례 행렬이 느릿느릿 움직이면 얼마나 우울한 기분이 드는가! 뒤따르는 마차의 행렬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차 안을 한번 들여다보라. 모두 텅 비어 있다. 다시 말해 고인을 따라 도시의 모든 마부가 무덤까지 배웅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우정과 경의를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 행위의 거짓, 천박함, 위선이다. 
성대한 환영 파티에 초청받아 예복을 입고 온 수많은 하객은 또 다른 예다. 그들은 고상한 고급 사교계의 간판이다. 실은 그들이 온 것이 아니라 대체로 속박과 고통, 무료함이 온 것이다. 많은 손님이 오다 보면 가슴에 모두 훈장을 달고 있다 해도 무뢰한이 다수 끼어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좋은 사교모임이란 어디서나 필연적으로 극히 소수이다. 일반적으로 화려하고 떠들썩한 축제나 향연에서는 항시 공허감과 심지어 내적 불협화음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런 자리는 인간 생활의 비참함이나 빈곤과 완전히 모순되기 때문인데, 이러한 대조가 진리를 더욱 부각한다. 겉으로 그 모든 것이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 목적이다. 
학술원이나 철학 강단도 지혜의 간판이며 겉모습이다. 지혜도 대체로 그런 곳에는 나타나기를 거부하므로, 전혀 다른 데서 찾아봐야 한다. 계속해서 울리는 종소리, 사제의 복장, 경건한 몸가짐, 근엄한 동작 등은 경건함의 간판이며 거짓 겉모습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은 속 빈 호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알맹이 자체는 드물며, 그것이 껍데기에 들어 있기는 더욱 드물다. 

쇼펜하우어 『행복론』   

   

세상을 살다 보면 갖추어야 하는 예의가 있다. 당연히 예의는 중요하다. 일일이 타인의 감정에 동조할 정도로 여유가 없는 바쁜 현대인들은 그나마 예의를 갖추기 위해 모양새를 갖춘다. 문제는 이것이 아주 당연시되다 보니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이 생긴다. 축의금을 내기 위해 참석하고, 눈도장에 립서비스, 심한 경우는 정작 당사자들에게 진정 어린 축하나 위로는 하지 않고 밥만 먹고 오는 경우도 있다.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로 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알맹이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바리사이들을 꾸짖는 예수의 질책, 알맹이 없는 껍질을 이야기하는 쇼펜하우어의 지적 앞에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젊은 시절의 방탕한 삶을 뉘우치고 자기 자리로 돌아온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런 주님을 나는 정말 너무나 늦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내 안에 계셨는데, 나는 밖에서 주님을 찾다가, 주님이 지으신 저 아름다운 것들 속으로 뛰어들어서, 나 자신이 흉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하셨지만, 나는 주님과 함께 하지 않았고,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존재할 수조차 없는 저 피조물들에 사로잡혀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나를 부르시고 내게 소리치셔서, 귀머거리가 된 내 귀를 열어 주셨고, 번쩍이는 광채와 밝은 빛을 내게 비쳐 주셔서, 맹인이 되어 아무것도 볼 수 없던 내 눈을 뜨게 해 주셨으며, 향기를 풍기셔서, 나로 그 향기를 맡고 주님을 사모하게 하셨고, 주님 자신을 맛보게 하셔서, 나로 주님을 향하여 주리고 목마르게 하셨으며, 나를 만져 주셔서, 주님의 평안을 열망하게 하셨습니다.

『고백록』 10권 27장.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354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현재 알제리 수크아라스)에서 어머니 모니카의 맏아들로 출생하였고,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마니교에 깊이 빠진 후 회개하고 카톨릭에 입교하여 391년에 사제가 된 후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어거스틴이 주님이라고 말한 것은 껍데기의 반대 개념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껍데기로 살 때 느끼는 공허감은 말 그대로 무엇인가 비어있다는 말이다. 비어 있는 곳은 알맹이를 찾을 때 채워진다. 어거스틴은 그 알맹이가 바로 자기 안에 있다고 고백한다. 그는 그것을 인생의 허랑방탕한 삶을 돌아 발견하게 되었고 그의 발견을 고백록으로 남겼다. 위선僞善 즉 거짓 선,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는 오늘날 우리들의 주변을 만연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많은 문제들의 근본 원인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알맹이가 없으니, 속과 겉이 겉도니, 진실한 자기로 살지 못하니, 행복할 수 있을까?      


오늘 하루 예의를 가장한 위선을 멈추기를! 

오늘 하루 알맹이를 놓치지 않기를! 

내 삶에서, 껍데기는 가라!   


        



비가 와서 시원한 기분 좋은 아침입니다. 

습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더운 땡볕보다는 낫습니다. 

사회는 별 일이 많지만 

별 일 많은 세상 한가운데 

숨을 쉬고 움직이고 글도 쓰고 있는 것이 행복 한 자락임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오늘도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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