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 놓은 창으로 솨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벌어지는 춤판.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의 몸짓, 나부끼는 커튼의 부드러운 곡선, 창틀에서 밖을 응시하며 기분 좋게 흔드는 양이꼬리의 살랑거림, 그리고 커피에서 피어오르는 향기의 그러데이션. 이 모든 것의 합주에 화룡점정처럼 녹아드는 이루마의 피아노 소리
아침에 일어나면 오전 내내 마실 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담아두고 한잔씩 따라 마신다. 보온병을 잔에 기울 때의 기분이 마치 술을 따르는 그런 느낌이다. 한잔 기울이는 커피에 음률이 또한 안주가 되어 취하는 듯하다.
이루마라는 이름에 관련된 에피소드, 그리고 최근에 코로나 상황에서 온라인으로 역주행되어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했던 곡으로 다시 회자되던 음악인 정도로 알고 있었던 그의 음악이 요즘 집에서 아침시간을 보낼 때 자주 틀어놓게 되는 단골 음악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클래식 피아노 음악에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다른 장르에 대해 무지하고 선입견이 있는 내가 웬일일까?
클래식 대신 이루마
뭔가 품격 따지고 싶을 때는 클래식 음악을 들먹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20여 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후 합류하게 된 오케스트라에서 꽤 열심히 활동하며 연주회도 수차례 해보았는데 그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었다. 왜 레퍼토리가 뻔한가? 옛날 사람들, 그것도 서양 사람들의 곡만 주로 연주하는가? 더 나아가 왜 남의 곡을 연주하는가? 물론 내가 내 곡을 연주할 깜냥이 안되니 마지막 질문은 제외하더라도 앞의 질문에 대해서는 늘 의구심이 있었다. 클래식 그러니까 정통 음악에는 시공을 넘어 공유되고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 지금도 듣는 이를 감동시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말이다. 예컨대 피아노로 시를 쓰는 쇼팽을 대체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때로는 누군가에게 어느 순간에 특별히 다가오는 음악이 있다. 지금 내게 이루마의 음악이 그렇다. 동시대 같은 나라 사람이 만들고 연주하는 곡. 그것으로부터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 불가한 기쁨 한 자락을선물 받고 있다. 노래처럼 단순한 음률을 가지면서도 한 개의 악기가 풀어내는 소리가 단조롭지 않다. 음악의 대가들이 들려주던 화려함 웅장함 고난도의 기법 같은 것 보이지 않지만 색다른 미묘한 즐거움이 있다. 비발디의 봄도 좋지만 이루마의 spring waltz가 지금은 더 반갑다. 어쩌면 음악조차도 남의 귀로 들은 걸까? 내 귀로 듣지 않은 걸까? 지금 내 귀에 좋은 음악 이루마의 음악을 들으며 나의 음악을 찾고 싶어졌다. 귀를 닦아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