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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Sep 18. 2021

슬퍼하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 슬픔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를 사는 것에 대하여 -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     



1. 아픈 기억이 지워지는가?     



자의든, 타의든 어떤 선택으로 가게 된 길에서 엄청난 불행을 당했을 때 우리는 후회, 미련의 감정과 더불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된다. 그때 왜 그 사람을 만났을까? 그때 왜 그 버스를 탔을까? 왜 그 가게에 들렀을까? 등등. 그래서 간직하기 싫은 과거의 어느 시점을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문제는, 그게 안 된다는 사실에 있다. 발버둥 치다 이르는 결론은 기억의 저편에 눌러 감추어놓거나, ‘운명' 같은 말로 포장하며 애써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별 효력이 없다.     



개인의 경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좀 더 큰 집단적인 무게를 가지는 경우는 어떨까?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불가항력적인 사건을 만나는 경우 말이다. 책임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기도 애매하고, 이유를 규명하기 힘들어질 때 그저 운명이나 우연으로 일축할 수 있을까? 어떤 구실을 대어서라도 지워버리고 싶으나 지울 수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2. 우리 사회, 지울 수 없는 기억    


 

2014년 4월 16일.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304명(전체 탑승자 476명)이 사망·실종된 대형 참사가 있었던 날. 내가 이날을 직접 다시 기억하는 순간을 직면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원하지 않았다. 글의 방향을 아무리 돌리려 해도 다시 다시 돌아오는 이 끌림은 무엇일까? 친한 친구 중에 참 열심히, 정성껏 세월호 유가족의 모임에 참여하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가족들의 치유를 위해 애쓰는 친구가 있다. 소식을 보내오고, 모임에 초청하고, 관련 책도 사서 주기까지 한다. 친구한테 미안하지만 나는 일부러 책을 열어보지 않았고 클릭해서 읽고 싶지 않았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의 무게를 견딜 수 없나 보다. 



사건이 있은 지 올해로 7년이 되었다. 내가 만약 그 아이들의 엄마라면, 나는 7년이 지난 지금 어떨까 하는 질문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 내 알량한 슬픔이 무색해지는 그들의 슬픔을 떠올리며 인생의 어느 부분을 지우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게 바로 내 일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우고 싶은 그러나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3. 나,  지우고 싶은 상실의 경험  


   

가라앉는 배는 나의 무의식을 건드린 건 아닐까? 아파서 바라보기 힘든 기억 때문이 아닐까? 20대 후반, 아직 미혼이었을 때 내 생애 가장 큰 충격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멀쩡하던 그 엄마의 모습을 그 이후로는 볼 수 없었다. 뇌지주막하출혈로 쓰러지시고 몇 차례의 뇌수술, 그리고 뇌의 일부가 죽은 상태에서의 10년의 투병 그리고 죽음.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렇게 슬퍼하지 않았다. 엄마는 천국에 가셨어. 괜찮아. 박제된 새처럼 내 감정은 느낄 줄을 몰랐다. 제대로 받아들이기 싫었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다. 길에서 넘어진 사람이 주변의 시선이 창피하여 순간 아픔도 모른 채 벌떡 바로 일어나 쏜살같이 걸어가는 것처럼 나는 내 슬픔을 다루는데 미숙하여 너무 신속하게 숨겨버린 것이다.     



4. 슬픔은 어디로 갔는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처럼 무기력하게 가라앉는 배를 보며, 무참히 물속으로 가라앉는 생명을 보며, 당시 우리는 집단 우울증세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그 사건은 의심, 절망, 무기력, 분노, 희망, 체념, 무감각의 사이클을 돌며  역사 속에 기억되는 사건으로 서서히 잊혀가고 있다. 우리의 그 감정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드러나지 않다뿐이지 어디든 깊이 숨어 언제든 그 괴물 같은 얼굴을 내밀려 하지 않는가? 사회이든 개인이든 이 지점에서 유사하다. 내가 내 슬픔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기억 저 너머에 꼭꼭 숨겨놓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런 사건을 제대로 두 눈 뜨고 보지 못하고 건강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자꾸 피하는 것처럼 말이다.        


  

5. 슬픔을 허락하라.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 - 자크 데리다 -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은 세계가 끝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강남순 -     



죽음이든 이별이든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은 세계가 끝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기에, 그 관계가 단절될 때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슬픔을 허락받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 슬픔을 딛고 일어설 힘이 없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긍정적인 감정만 격려받고 자랐던 나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이 서툴렀다. 나는 괜찮아야 했다. 나는 의연해야 했다. 슬픔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내 안으로 밀어 넣어 내면화되어 건강한 삶을 방해했다. 사회의 슬픔 역시 상처를 드러내고 규명하고 싸매주는 과정 없이 미봉책에 그치면 사회 전체의 건강을 해치게 된다. 억눌린 감정은 언제든 역기능적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항상 기쁨으로 가득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슬픔을 느끼도록 슬퍼해도 되도록 좀 더 나에게 너에게 너그러우면 좋겠다. 그럴 때 비로소 그 아픈 기억이 이전의 아프기만 한 기억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상실 후의 지금 남은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어떤 삶인지 보일지 모른다.     



슬퍼하라. 

슬퍼하라.

구원을 얻게 되리라.          




* 이 글은 <글로 모인 사이>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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