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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Sep 19. 2021

이별할 때

그게 너의 마지막 모습일 줄은....

      

가을 햇살이 제법 따사롭다. 창가에 둔 아이비가 바짝 말라있는 것이 지금에야 눈에 든다. 녀석이 소생할 수 있을까? 그늘 쪽에 두고 물을 주어보는데 마음이 아프다. 며칠 신경을 쓰지 못한 사이에 녀석이 너무 말라버렸다. 경험상 이 정도면 복구 불능이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소생하기를 기다려볼 것이다.    

  

바짝 말라버린 아이비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던 그야말로 싱싱할 때의 기억을 추억한다. 남자고등학교에 많지 않던 여교사 중에 가장 연배가 높으신 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늘 당당하고 여장부 같은 분이셨고 중요한 직책을 도맡아 하시던 분이었는데 재단 내의 내가 근무하던 학교로 전근해오시면서는 그냥 평교사이셨다. 젊은 날의 나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몰랐다.

      

꽃을 좋아하고 꽃 선물하는 걸 좋아하는 내가 그때도 동료 교사에게 생일선물로 준 노란 백합꽃이 다닥다닥 붙은 책상 위에 놓여있었는데 삭막한 남자고등학교에 꽃이 흔치 않아 책상 위에 놓인 노란 꽃은 유독 눈에 뜨였다. 동료 교사와 옆자리였던 그분은 유독 그 꽃이 아주 잘 보이는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핀 꽃이니 당연히 지는 법일 텐데 시든 꽃을 뽑아내는 순간에 그 당당하시던 분 눈에서 뜬금없이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진다.....      


관련된 자세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지 지는 꽃과 그분의 눈물 기억에 대한 인상만은 오래도록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그 기억 인상이 소환되는 순간들이 있다. 몇 년 전 소임을 다하고 떠나던 냉장고, 말라버린 아이비, 그리고 우리 집 세탁기.

     

무슨 문제인지는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열심히 돌아가던 세탁기가 급수가 되는 지점에서 에러가 뜬다. 수돗물 급수에는 이상 없는데 왜일까? 내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라 as를 불러야겠다고 마음먹고 며칠 보내다 혹시 해서 다시 작동해보는데 야호 다시 아무 일 없는 듯 세탁기가 돌아간다. 솨 하며 물을 받아내며 열심히 이리저리 굴리고 탈수까지 깔끔하게 해낸다. 너무 반가워서 사진을 찍었다. "요 녀석 기특하네. 그래 그동안 힘들었나 보다." 이제 좀 더 힘을 내서 오래오래 일해주길 빌어본다. 남들 다 쓴다는 신형 건조기를 구입하고 싶은데 그래도 멀쩡하게 돌아가는 세탁기를 왜 바꾸냐며 자제하면서도 오래된 구닥다리 세탁기 교체할 구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상하다. 녀석이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사물에 이런 감정이 생기다니... 내가 왜 이러지?


세탁이 잘 마무리되었다. 건조를 위해 건조하면 안 되는 몇 가지 의류를 꺼내고 나머지는 건조기능으로 작동시켰다. (건조기능이 딸려있는 옛날 세탁기) 그런데... 그게 그의 마지막 움직임일지 몰랐다. 건조가 다 끝날 즈음에 가보니 아... 전원 자체가 꺼진 채 세탁기는 멈춰있다. 세탁기 문은 아예 열리지 않는다.


나의 세탁기 마지막 운행 모습

기사님이 다녀가셨다. "그냥 바꾸셔야겠어요. " 회로를 교체하는 것으로도 해결될 문제가 아닐 정도로 복구 불능의 상태. 보통 가전제품을 5-6년 쓰고 교체하는 게 좋다는데 나는 12년째 쓰고 있다. 물론 더 오래 쓰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굳이 작동이 되는데 교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 지금껏 잘 쓰고 있었다. 늘 집구석에 놓여 눈길 제대로 못 받았지만 이 녀석이 없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을 12년 동안 해온 녀석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사물도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그렇게 자기 역할을 다하고 사라지는 때가 온다. 지는 꽃을 보며 눈물짓던 선배교사의 눈물이 이제는 이해가 된다. 몇 년 전 소임을 다하고 집을 떠나는 냉장고를 보며 울컥해버린 나. 우리 집 가전제품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아내고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났다. 이제 세탁기가 내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나의 세탁기야! 어쩌면 그냥 세탁기라는 말로 다 포함할 수 없는 너의 특별함이 있는데 따로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게 미안하다. 그래서 나의 세탁기로 불러줄게.  너의 마지막 혼신의 질주를 기억할 게. 고마워.

나의 아이비야! 너의 생글거림을 기억할 게. 어디에 정신이 팔려 너를 기억하지 못하고 목마른 채 버려두어 미안해. 다시는 식물을 집에서 키우지 않으리라던 결심이 무색하게 자꾸 너를 데려와 키우는 내게 주었던 생명의 찬란함을 기억할 게. 고마워.


그리고 언젠가 이별할 때

나도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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