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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Sep 20. 2021

Freedom from the kitchen!!

엄마, 추석 때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돼?


   

마트마다 가격대 선물세트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면 설레기보다 불편해진다. 즐거운(?) 명절이 다가오는구나. 온 가족이 모여 행복한(?) 명절이 다가오는구나.... 과연 그런가? 명절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싹둑 잘라버리고 싶은 나는 내 진심을 드러내지도 못하면서 젊은 날을 꾸역꾸역 버티었다. 집마다 분위기가 다르겠지만 유독 가부장적인 시댁 분위기에서 나는 주눅이 들었고 나를 포함한 우리 집안의 며느리들은 명절 때마다  하루 종일 전을 붙이고 나물을 볶으며 언제쯤 이 일을 끝낼 수 있을까 하며 해결 없는 불평을 쏟아내었다.


명절 차례 간소화 관련 뉴스포스트 설문조사에 의하면 여성의 91.4%, 남성의 46.1%가 간소화에 찬성했다고 하는 통계 결과만 봐도 여성들의 부담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통계 결과가 아니라도 대다수의 여성이 명절 음식 준비에 부담을 느끼는 건 명약관화한 일인데 왜 상황은 변하지 않을까?

     

몇 년 전에 덜컥 허리가 심하게 아팠다. 허리디스크였다. 심한 경우에 받는 수술은 대부분 권장사항이 아니다. 따라서 간단한 주사 시술, 물리치료, 운동요법 외에는 뾰족한 답이 없고 회복을 위해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결국 물을 싫어하는 내가 수영을 시작했고 시간의 많은 부분을 치료를 위해 병원을 오가며 보냈고 약국도 자주 들락거렸다. 그래서 단골약국이 생겼다. 특이하게 성의 있는 상담을 거쳐 약을 처방해주는 동네약국이 입소문이 나서 예약을 하지 않으면 갈 수가 없는 곳인데 내가 알기로 대부분의 환자가 50세 이상의 여성이다. 명절을 앞두고 몸 상태가 아주 안 좋아져서 약국에 들렀다. "근간에 특별한 일이 있었나요?” "아뇨,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대답을 하다 불현듯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아, 명절!!  

    

“알았어요. 명절 때문인 것 같아요. ”  명절 분위기가 점점 가까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많이 가라앉기 시작했고 이어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마침내 옆에 기다리던 다른 여성분에게 눈길을 돌리며 내가 물었다. "저기요, 추석이 행복하세요?" 참 나도,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 대뜸 이런 질문을 하다니.... “난 여자들에게 묻고 싶어요 명절이 행복하냐고요.” “명절이 행복한 여자가 어딨어요?” “난 나만 그런 줄 알았네요. 근데 왜 행복하지 않은 명절을 늘 이렇게 보내야 할까요?”“뭐 답이 있나요? 다 그러고 사니까..... ”    




다 그러고 사니까....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82년생 김지영>에서 유독 내 레이더에 걸리던 대사였다. 여자로서 경험하는 불이익과 불편에 대해 김지영 자신이, 혹은 동료 직장인이, 그리고 그녀의 기억 속의 어머니가 한 대답이 그랬다. “항상 그래 왔으니까, 다 그러니까”였다. 역사와 다수의 힘은 세다. 대부분은 거기에 저항을 못한다. 나 역시 그랬다. 당연히 해야 하는 여자의 몫이라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 몸이 먼저 말을 시작하면서 이건 아니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표면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더 나아가 <82년생 김지영>이라는 나보다 어린 연배의 여성들의 삶을 보며 하나도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편해졌다는 점도 있지만 근저의 흐름은 그대로라는 직감이었다.  아! 나의 딸들도 나와 별 다르지 않겠구나. 달라져야 해. 이대로 살아서는 안 돼.

     

몸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은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몸이 아픈 것에 대한 관심도 처음 몇 번이지 장기화되니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긴다. 결국 내 몫이구나. 내가 해결해야겠구나.


그래서 어느 날 가족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내 시간이 병원에 다니는 것, 운동하는 것 그리고 조금 움직일 수 있으면 부엌에서 보내는 것으로 하루가 다 가서 다른 건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침식사는 내가 준비하겠지만 저녁식사시간은 나도 자유롭고 싶어요. "


갑작스러운 내 태도에 가족의 반응은 나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내 행동변화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당연히 명절 분위기도 바뀌었다. 사서 먹을 수 있는 건 사고, 각자 먹고 싶은 메뉴있으면 직접 만들거나 사 오거나 하기로 했다. 그렇게 명절의 풍속도는 바뀌었고 지금은 이전에 비하면 훨씬 편해진 명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픈 걸까? 이미 내 세포 속에 명절이 주는 분위기가 입력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양가 부모님도 다 돌아가시고 이제는 특별한 의무도 없는데 명절이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눈치챈 아들이 어느 날 나를 도발한다. “엄마,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돼?”   

    

그래, 정말 명절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라면 그래 보자.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자. 나는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고, 아무 곳에도 안 가기로 했다. 당장 몸상태가 안 좋으면서 이런 몸을 하고 뭔가를 하고 어디를 갈 지경이었는데 그것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키기로 했다. 그러니까 잠시나마 모든 의무로부터 놓여나기로 했다. "걱정마요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 이래도 되는 걸까? 뭐 어떻게 되겠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몸이 먼저 내게 말하지 않았다면 실행하지 못했을 일들이 내 삶에도 일어난다. 개혁이다.  부엌에서 몇 발자국 벗어나는데 평생이 걸렸다. 당분간 부엌을 멀리하기로 했다. 물론 부엌은 아무 잘못이 없다. 부엌을 사랑하기 위해 당분간 내 몸이, 아니 내 마음이 습관처럼 향하던 부엌 앞에 경고문을 붙이겠다.


Freedom from the kitchen!

   

사실은 가족이 나보다 더 음식을 잘하고 관심도 많다. 남편은 김치 담그기에 수준급이고  딸아이들도 한 요리한다. 아들은 요즘 우리 집 주방장이다. 부엌이 마치 내 전유물인 것처럼 그렇게 살지 않아야 한다. 부엌은 온 가족이 드나드는 곳이어야 한다. 너무 오래 부엌에서 동동거렸으니 당분간은 이 지겨움이 해소될 때 까지는 부엌을 멀리하리라. 그들의 속은 모르나 (대충은 안다) 나의 반란은 계속될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모색하는 중이다. 이봐요, 우리 함께 잘 살아봐요.


 Again,

Freedom from the kitchen!!     


부엌에 붙인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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