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느 순간 한 번쯤은 봉착해본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은 피하고 싶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글로 말로 또한 작품이나 행위로 풀어낸 많은 결과물들이 있음에도 여전히 쉽지 않은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 앞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딱 꼬집어 대답할 수 없다. 내가 들었던 대답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대답은 “그냥 살아”였다. 그러나 살아온 세월이 있고 앞으로 남은 세월을 예측할 수 없는 이 지점에서 내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당위성과 표현하고 싶은 갈망 앞에 마주쳤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여전히 진행형인 질문 앞에서, 내 인식과 경험 혹은 그 너머의 것으로 삶을 보고자 한다. <보통사람들의 특별한 만남> 시리즈에서는 비록 넓지 못한 스펙트럼의 제한된 삶을 살아왔지만 그 과정에서 고민했던 삶의 근원적인 질문과 관련된 사유들을 풀어내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은 모습으로서의 사람들을 만나보고자 한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예수를 버리다
삶이 변한 많은 사람들이 만났던 인물이 바로 예수다. 그런데 불행히도, 나는 오래 예수를 믿는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이었지만, 내 삶이 변하지 않았다. 분명히 애를 쓰는 데 깊은 곳의 공허를 느꼈다. 항상 무엇이 부족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예수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실체가 아닌 예수를 알려주는 방편들, 그러니까 종교라는 틀, 기관의 규례, 종교지도자들, 종교와 결부되어 혼합된 관습들을 진리인양 따르는 내 모습을 만난 것이다. 제대로 알기 위해 기존의 틀을 버려야 했다.
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예수가 정말 궁금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제대로 알기 위해 내가 그동안 알고 있는 예수를 버리기로 했다. 습관적으로 행하던 의례가 아닌 자발적인, 간절한 관심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하자, 새롭게 보이는 예수의 모습이 있다. 더 이상 저 하늘 위의 신비의 존재가 아닌 이 땅에 나와 같은 인간 예수의 모습이다. 성경은 읽을수록 내 이해를 넘어서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 인식과 신비 사이를 오고 가는 그 알 수 없는 세계는 차치하고라도 내 레이더에 걸리는 어떤 모습이라도 찾아보고 싶어 진다.
보통사람 예수
2000년이 지났지만 왜 예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 '아! 이 사람 정말 진국이다'하는 사람을 만나기 쉬운가? 아무리 존경하는 사람이라 해도, 함께 생활을 해보면 어느 순간 그의 한계를 보고 실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자녀에게 절대 신뢰의 대상이던 부모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아예 내 아이들에게 존경받을 것은 기대도 않는다. 그저 이해와 연민 정도를 바랄 뿐이다. 어쩌면 그마저 내 욕심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는 시간과 공간을 너머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의 추종을 받는다. 게다 곧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적어도 궁금할 가치는 충분하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수성이 있으니 뭐 별난 사람이겠지 싶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기적을 일으키고, 병을 낫게 하고, 사람을 살리고, 멋지게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 결과 현실 속의 나와 관련짓기가 쉽지 않고 자꾸 공허해지는 딜레마가 있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어 졌다. 범접할 수 없는, 나와 상관없는, 하늘 위의 인물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서의 예수를 보고 싶어 졌다.
알다시피, 그는 이스라엘의 어느 깡촌마을 나사렛의 가난한 집 출신이며 직업은 목수였다. 그의 삶은 그리 대단하지도 않았기에, 당시 유대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의 유대 역사기록에도 그의 삶의 기록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그가 당했던 십자가형의 죽음조차 당시 죄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일어나는 상시적인 것이어서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부활?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의 증언을 처음에 제자들도 믿지 않았고,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를 만났던 제자들은 아예 부활한 예수를 처음에 알아보지도 못했고, 의심쟁이로 유명한 도마는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발칙한 발언도 했다. 그의 부활에 관한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무엇이 사람들을 미친 듯이 변화시켰을까? 왜 바울은 만나보지도 못한 예수를 어느 날 길가에서 만나 사람이 180도로 변하고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기는가? 왜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는가? 왜 많은 제자들이 겁 없이 선교여행을 하는가? 그 힘은 무엇인가? 그저 맹신자로 치부해도 되는 것일까? 그런 것이라면 금방 사라질 것인데 이토록 그를 추종하는 행렬이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예수를 만나고 삶이 변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가기 시작한다. 순수 호기심에서 성경을 다시 보기 시작하며 성경의 한 장면으로 첫 번째 에피소드를 열어본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만남
요한복음 4장에 의하면 예수는 세례 요한보다 예수가 더 많은 세례를 베푼다는 소문을 바리새인들이 들었다는 것을 듣고 중심 되는 유대를 떠나 작은 마을 갈릴리로 가고자 했다. 사람들의 존경, 관심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고 당시 세력의 중심이었던 바리새인 들을 위협하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 요주의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을 알아차린 예수는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갈릴리로 가는 길에 통과해야 하는 마을은 사마리아라는 마을이었다. 당시 유대인은 이방인 사마리안과 상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쳐가지 않고 일부러 다른 곳으로 둘러 목적지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지나가지 않는, 선호하지 않는, 피해 가는 지역을 통과했다. 그리고 거기서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나게 된다.
시간은 정오 무렵이었다. 유대 지역의 그 시간은 아주 더운 시간이라 사람들이 이동하지 않는 시간이다. 하필 사람들이 이동하지 않는 시간에 물을 길으러 나오는 여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여자다. 그녀는 부끄러운 것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가장 더운 시간에 생존을 위해 물을 길으러 나오는 여자이며, 지금 남편 이전에 남편이 5명이 되었던 기구한 삶을 사는 여자였다.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리는 소외된, 최하층 계급에 속하는 한 여인을 우물가에서 예수가 만난다.
특별한 교통수단이 없어 사마리아까지 걸어 이동해야 했던 예수는 지쳐 잠시 우물가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물 뜨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청했다. 마침 동행하던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가고 없었고 그와 사마리아 여인 단 둘만 있었다.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가 그런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기록되어있다.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는 물동이조차 두고 마을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그가 만난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고, 그녀의 말을 듣고 예수를 직접 만나러 왔던 마을 사람들은 그를 그곳에 더 머물게 하여 예수는 이틀을 함께 지내다 갈릴리로 갔다는 이야기다.
왜 사람을 피하던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의 중요한 삶의 도구 물동이를 내려놓고, 더 중요한 어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가 생겼을까? 서로 상종 않던 마을 사람들이 왜 예수더러 이틀을 더 머물라고 했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틀을 예수와 함께 지낸 후 사람들은 “이제 우리는 당신의 말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확실히 알게 되었소”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성경에는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이야기를 제법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목마르지 않는 물, 예배처소, 남편이 6명이 되지만 진짜 남편이 없다는 말 등등. 책을 읽을 때 읽어야 하는 행간의 의미가 있듯, 성경도 마찬가지로 이야기 속에 함축된 의미를 읽어내려야 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사마리아 여인의 존재적 변화이다. 카이로스의 순간을 경험한 그녀의 삶은 완전히 변했다. 예수와의 대화의 어떤 부분이 그 여인의 존재를 변화시킨 것일까? 예수를 버린 나는 그 예수를 만나고 싶다.
예수와 일행이 갈릴리로 떠난 이후에 그 여인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지만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추측건대, 남편이 6명이 되도록 진짜 남편이 없다는 삶의 가장 아픈 현실을 고백을 했던 그녀는 자신의 현주소를 발견하며 새로운 무엇으로 채워졌던 것 같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시게 된 것이었다.
사마리아를 굳이 통과해서 가려는 예수에게서 나는, 버림받은 배제당한 사람들에 대한 마음을 유대인의 관례라는 관습 앞에 거두지 않은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유대인이 즐겨 찾는 길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불편하고 척박한 길을 걸어야 하는 육체적인 고생을 각오해야 했으리라. 사람들이 외면하는 여자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상황에 대한 수군거림을 감당해야 했으리라. 무엇인가? 모든 시선, 관습을 떠나 삶의 고통 한가운데 있는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 예수. 나는 이 지점에서 예수가 새롭게 보이고 이런 예수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도 다르지 않은 인간이었다. 유대 한 고을에서 가난한 집의 여러 자녀 중 한 아이로 태어났다. 유년기 기록은 많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그 역시, 삶의 정황 속에서 관습을 익히고, 당시 사회에서 꼭 필요한 공부를 하고, 생계를 위한 기술을 익히고, 삶에 대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통찰을 얻었을 것이고, 그의 남다름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평범함 중에 내가 주목하는 남다름은 한 사람을 만나는 마음이었다. 핑계 대지 않고 고생을 마주치는 모습이었다. 관습에 따른 판단을 너머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틀이나 함께 머물렀다는 점이다. 그것 때문에 작은 마을에 아마 동요가 일어났을 것이고 기록 외의 것이지만 그 마을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어딘가 삶의 언저리에서 말을 거는 예수
사마리아 여인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경험했다. 남편이 있어도 남편이 없는 그는 목이 말랐다. 그런 그에게 해갈의 기쁨이 찾아왔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열심히 달려보지만 항상 목이 마르다.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실존의 현주소와 다를 바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사마리아 여인이 부럽다. 목마르지 않는 물을 발견한 기쁨이 부럽다. 물론 현실적 삶을 위해 그 이후에도 우물물을 길으러 오는 일상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외적인 삶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더라도 그의 내면은 완전한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참된 필요, 궁극적 갈망을 알아차리고 말을 건넨 예수. 그리고 예수와의 대화에서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인정했던 사마리아 여인. 그 어느 지점에서 카이로스적 사건이 일어났다. 성경에서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의 하나 앞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피곤하여 우물가에 앉아 마실 물을 청하던 예수를 나도 나의 삶 어느 언저리에서 만나고 싶다. 지금도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날 부르는 소리를 놓치고 싶지 않다.
나모다 씨! 어디 가세요? 물 한잔 주실래요?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은 존재의 기반이었습니다.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남편을 바꾸었으나, 그녀는 정작 남편이 없다고 합니다. 존재의 기반이 없다는 말이지요. 당신의 존재의 기반은 무엇입니까? 돈, 건강, 지위, 학력, 집, 배우자, 관계? 존재의 기반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흔들린 적은 없나요?
* 카이로스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순서상의 객관적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대조적으로 특별한, 주관적 시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