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price

날로 먹지 않기

by 나모다


큰 명절이 끝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쉬울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오면 반갑지만 가면 더 반가운 손님'과의 이별에 아쉬움과 개운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지 않을까요. 유독 만남이 많은 명절에 우리의 만남은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반가운 사람들과의 만남의 시간인데, 당연한 관습을 따르는 자동반응인지, 정말 사람을 만나는 건지 질문 앞에 서면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특별한 만남을 매거진 형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우리의 모든 만남의 순간이 그저 그런, 지나가고 나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만남이 아니라 별이 반짝이듯, 눈이 초롱 떠지듯, 온몸의 세포가 반응하듯, 빛나는 순간일 수는 없을까요?

지난 글에 이어 오늘도 구태의연한 성경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구태의연하지만 구태의연하지 않은 만남을 성경의 인물을 통해 경험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글은 사무엘하 24장의 에피소드에서 시작합니다. 다윗과 선지자 갓의 만남, 그리고 다윗과 아라우나와의 만남을 통해 제 값을 치르는 것에 초점을 두고 싶습니다. 왜냐고요? 엿장수 마음이라는 거 아시죠? 엿장수! 요즘은 거의 보기 힘든 직업인데, 그 옛날에 경쾌한 엿장수의 가위 놀림 떠올리며 살짝 웃음 머금고 같이 들어가 볼까요?

참, 성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종교와 상관없이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특히 구약은 읽기가 부담스러운데, 역사적인 사실을 기초로 하여 기록된 역사서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비교하며 읽어보면 흥미를 놓치지 않을 것 같아요. 여러 가지 번역본이 있으나, 쉽게 접근하기에 메시지 성경을 추천합니다. 혹시 영어가 가능하신 분은 영역 대본으로 보시면, 영어 번역이 더 가깝게 전달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인용하는 성경은 메시지 성경을 참고했습니다.









사무엘하 24장 인구조사 이야기



인구조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사무엘하 24장은 사울, 사무엘, 다윗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루는 사무엘기(상하)의 제일 마지막 장이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한나, 사울, 사무엘의 이야기에 이어 대부분의 이야기 속 주인공인 다윗의 인생 후반의 이야기이다. 유대인의 별이기도 한 다윗의 인생 후반은 어땠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복한 인생 말년을 보냈을까?

보잘것없는 목동에 불과했던 한 소년이 유대인의 초대 왕 사울을 이어, 왕이 되고 유대 지역을 평정하게 된다. 나라가 부강해졌으니 별 걱정도 없을 텐데, 하필 다윗은 인구조사를 하게 된다. 장군 요압에게 인구조사를 요청하다 강한 저항에 부딪힌다. 말이 인구조사이지 B.C.1000년 경에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경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결국 장군 요압은 왕의 명령에 따라 군지휘관들과 인구조사에 들어간다.

그들은 온 땅을 두루 다니다가 아홉 달 이십일 만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다. 요압이 왕에게 내놓은 인구조사 결과는 건장한 군사가 이스라엘에 800000명, 유대에 500000명이었다.
사무엘하 24장 9절


세상에! 9개월 20일이라니! 장군과 군지휘관들만 대동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지휘를 따르는 엄청난 규모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혹은 걸어 먼 거리를 오가며 조사를 한 과정의 노고는 우리의 상상 이상일 듯 싶다. 인구조사 결과에서 그들이 유독 지목하는 건 오직 건장한 군사다. 군사력 측정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이는 주변 다른 국가의 침략에 대비하거나 침략하기 위한, 전쟁을 위한 자료조사이다.

이후에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백성의 수를 더 의지한 자신의 욕심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받은 선지자 갓으로부터 잘못에 대한 대가로 세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첫째, 나라의 온 땅에 삼 년 동안 기근이 든다. 둘째, 다윗 자신이 원수들에게 쫓겨 석 달 동안 도망 다니게 된다. 셋째, 나라에 사흘 동안 점염병이 돈다.

다윗은 자신이 사람의 손에 놓이는 것보다는 자비 많은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좀 경미한 벌을 받고 싶다는 속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그의 선택으로 결국 온 땅에 전염병이 임하고 칠만 명이 죽게 된다. 이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다윗은 뉘우친다.

죄를 지은 것은 저입니다. 목자인 제가 죄인입니다. 이 양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들이 아니라, 저와 제 집안을 벌해 주십시오
사무엘하 24장 17절


다윗의 눈이 떠지는 순간이다. 7만 명을 잃고 나서야 자신의 신분에 대한 깨달음이 왔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왕이 아닌 목자라고 했다. 어릴 때 양을 치는 목자.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신분이었다. 왕이 되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돌보아야 할 자신이 부끄럽게도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슬며시 하나님의 자비 운운하며 위기를 모면하려던 저의를 그대로 들키고 말았다. '양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멈추어 주십시오. 차라리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진실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값을 치르겠다는 각오다. 다윗이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만난 순간이며, 진짜 자기 모습을 본 순간이다.


이에 선지자 갓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으로 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한다. 그의 명대로 다윗이 아라우나에게 가자, 왕이 온 목적을 알게 된 아라우나는 왕에게 자기에게 있는 소와 타작 기구, 소의 멍에 등을 다 희생제물로 사용해도 된다고 기꺼이 내어 놓는다.

당연히 왕이니 백성의 한 사람으로 무상으로 내어놓는 것도 영광이겠고, 왕 입장에서도 백성의 한 사람이 선사하는 것을 공짜로 받는 것도 당연했을 테지만 다윗은 달랐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말했다. “아니오, 내가 제값을 치르고 사겠소. 하나님, 내 하나님께 희생 없는 제사를 드릴 수 없소.”
The king said to Araunah, “No. I've got to buy it from you for a good price; I'm not going to offer God, my God, sacrifices that are no sacrefice."
사무엘하 24장 25절








예수가 불편했던 사람들



잠시 신약의 이야기로 넘어오겠다. 인류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자 중 하나인 예수의 이야기다. 당시에 그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그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주로 권력층이었던 바리새인들, 종교지도자 들뿐 아니라 예수가 살았던 동네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의 기록은 공생애를 했던 30세 전후의 기록이 주를 이루고 그 이전의 유년기 기록은 아주 드물다. 그동안에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자라 목수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다른 면모를 드러내었다. 회당에서 지혜의 이야기를 해서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가나 혼인잔치에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도 하고, 병자들을 치료하니 여기저기 소문을 듣고 예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something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일약 인기 스타가 될 때 그것이 반갑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몫이 줄어들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당시 종교지도자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기득권 집단이 시기함은 이해할 수 있으나 동네 사람들은 왜일까? 왜 예수의 말을 불편해했을까? 예수의 말을 듣고 심각하게 고민하면 포기해야 하는 게 있었음에 틀림없다.


거라사라는 마을에 쇠사슬로 매어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친 사람이 있었다. 예수가 그 귀신을 쫓아내었을 때, 제정신이 돌아와 얌전하게 앉은 그 사람의 모습을 본 거라사의 사람들은 골칫덩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한 예수를 추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신을 쫓아낸 예수를 마을에서 쫓아냈다. 왜 예수가 불편했을까?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삶에 균열이 온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애써 피하려고 한다. 바리새인들, 예수와 가까웠던 동네 사람들, 거라사의 사람들 모두 신인류 예수가 반갑지 않았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뭔가 찔리는 게 있는데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값을 치르기 싫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지불한 제값 (good price)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더라도 변화가 필요하다면 과감히 그 새로움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그 힘든 일을 했기에 역사 속의 영웅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다윗에게는 분명히 영웅의 면모가 있었다. 인구조사를 하는 지질한 통속적인 보통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의 욕심을 들여다보았다. 제대로 반성했고 반성을 행동으로 취하려 했다. 선지자 갓이 제시한 세 가지중 하나를 선택할 때도 슬며시 자기가 취한 욕심을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그러나 알아차린 즉시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진짜 뉘우침을 선택한다. 진짜 뉘우침이 아니었다면 아라우나에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뉘우침은 제 값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물론, 7만 명을 죽인 것과 고작 타작마당과 제물을 사는 값인 은 50세겔은 정량적으로 비교도 안 되는 가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상징적인 면이다.


물건을 살 때도 우리는 싼 것에 집착한다. 너무 비싸도 문제지만 아무 값을 주지 않고 그냥 얻는 공짜도 어찌 생각하면 합리적이지 않다. 제대로 그 값을 주고 사는 것이 가장 조화로울 수 있다. 사람의 일에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값의 지불이 없는 반성의 전형적인 예는 영화 <밀양>에서의 유괴범이다. 그는 유괴로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과 아랑곳없이 하나님의 용서 타령하며 자신의 속죄를 믿는다고 했다.

반면 다윗은 아라우나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굳이 은 오십 세겔을 주고 타작마당과 소를 샀다. 값을 치르는 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친다는 표현이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그의 진짜 마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마음이 움직이셨고, 그로써 재앙이 그쳤다.

So David bought the threshing floor and the ox, paying out fifty shekels of silver. He built an altar to God there and sacrific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God was moved by the prayers and that was the end of the disaster.

영어 성경에 보면 the end of the disaster로 되어있다. 그 재앙의 끝이다. 그러니까, 다윗의 죄로 인한 그 전염병이 그쳤다는 말이 된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더래요'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위대한 다윗도 하나님을 감동시키다 타락하고, 실수하고, 욕심부리고를 반복했다. 그러나 자신이 한 죄악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는 진정한 뉘우침을 선택했다.


뒤집어 보면, 우리네 삶이 변하지 않는 것, 매일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것은 값을 치르지 않으려는 마음과 관계있지 않을까? 기존의 질서를 깨야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데, 새로운 세상도 원하면서 기존의 것도 깨기 싫은 이중적인 마음의 모순 때문이 아닐까? 케이크를 먹는 것과 가지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속담 (You cannot have and eat a cake too.)이 있다. 상충되는 것을 공유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하는데, 살다 보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에 맞닥뜨리게 될 때가 있다. 대부분 그 순간을 모면하며 다시 반복되는 패턴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 순간을 넘어서는 도약에는 용기와 더불어 이전의 잘못을 인정함에서 오는 값의 지불이 필요하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 그래서 그 자리까지 이르지 못한다. 물건을 사든, 어떤 일을 진행하든, 제 값을 치르는 것, 날로 먹지 않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good price이다.








오고 가는 만남 속에 선지자 갓처럼 내 깊은 곳의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순간들이 있지 않나요? 자주 진짜 내 모습을 보지 않으려는 내가 한심하면서,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진짜 만남! 인생의 변화는 그런 순간에 일어났지요. 변하고 싶다면서 변하지 않는 나 자신을 보며, 케이크를 먹고 싶은데 가지고도 싶다고 하는 모순 속에 갇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이전의 것을 인정하고 잘못에 대한 값에 대해 슬며시 넘어가며, 못 본 척 날로 먹지 않으며 제값을 치르겠노라는 태도. 그것을 배우고 싶어 집니다. 오늘도 주옥같은 스승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만나며, 행복하지만 아픈 순간 앞에 섭니다. 아!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가볍게 살고 싶지만 진짜 가벼워지기 위해 필요한 무거운 시간입니다. 무겁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피하지 말하야할 각자의 삶의 영역을 두드려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다윗이 던진 Good price를 내게 가져와 질문해봅니다. 잘 몰라서 오늘도 한걸음 한걸음 똑똑 노크하며 가는 길입니다.


나를 아프게 하지만, 나를 성장시키는 갓과 같은 누군가를 혹시 못 본 척 지나치지 않는지 되돌아 보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 집니다. '내가 제 값을 치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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