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소유

마리아와 가룟 유다, 존재 방식의 차이

by 나모다


복음서 세 곳에 소개되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는 마리아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이라는 것도 기록한 저자의 의도를 배제할 수 없어, 예수 주변의 모든 것이 기록되었다기보다 필요한 부분만 편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중요도가 떨어지던 여성들의 경우는 거의 기록내용에서 배제되었지만, 그럼에도 복음서 세 곳에 다 기록된 걸 보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가룟 유다와 마리아의 차이점이 확연히 눈에 들어옵니다. 왜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부어버렸는가? 라는 질문으로 마리아와 유다의 존재방식의 차이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11절의 배경은 유월절 엿새 전 베다니의 나사로 집이다. 나사로는 죽었다 살아난 것으로 유명해졌다. 고마운 예수를 위해 잔치가 벌어져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아 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비싼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지고 와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아 향유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덥고, 먼지도 많기 때문에 외출하고 돌아오면 꼭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했고, 먼지투성이의 발을 하인이나, 아랫사람이 씻겨주는 것은 문화적 관습이었다.

같은 현장에 있던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느냐고 반문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기에 유다의 질문이 맞다. 마리아의 행위는 미친 짓이고, 한 달 노동자의 삯에 해당하는 돈으로 굶주린 사람의 식량을 산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는가?


그러나 예수는 복음서가 기록되는 곳에 이 여인의 행위를 기억하라고 했다. 나는 이 장면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가룟 유다는 예수의 12제자 중의 하나였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였지만,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이 장면에서도 실제로 가난한 자에게 관심이 있기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유다는 마리아의 행위의 본질에 관심이 없거나 보지 못했다. 그는 오직 예수를 따름으로, 종교적인 삶을 추구함으로 삶의 최고봉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관점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자신의 목적 달성 방법이 세속적인 업적 대신 종교적인 업적으로 치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는 관심으로 그는 마리아의 행동의 바탕에 대한 관심은 아랑곳없이 향유의 값에 대한 산술적 이해에만 집중했다. 그의 존재방식은 결국 은 삼십 세겔에 예수를 판 배신의 아이콘으로 귀결되었다.

사회적 신분이나 처지에서 본다면 마리아는 유다보다 못한 상태였지만, 오히려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어버린다. 한 달 월급을 손님의 발을 씻기는 데 사용하다니! 왜 그랬을까? 성경은 언제나 행간과 전체 맥락을 넘나들며 읽어야 한다. 형제 나사로를 살린 기적에 대한 보답일까? 물론 이 기적적인 사건도 포함되겠지만, 그 과정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실체를 만났음에 틀림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예수에 대한 존경, 사랑의 표현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을 넘어선 모습이었다. 순전한 나드라는 말은 어떤 불순물도 포함되지 않은 순도 100%를 상징한다. 예수를 통해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군더더기 없는 순전한 마음, 가장 고귀한 마음의 표현을 상징한다. 가장 귀한 것, 즉 자신을 드릴 정도로 귀한 존재적 만남을 경험했던 마리아였다. 그리고 예수는 마리아의 그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제자들은 자주 누가 하늘에서 높으냐는 실랑이를 벌였다. 예수를 따르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높고 낮음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눈이 뜨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예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결국 가장 인정받는 제자 자리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있었고, 위기상황에서 부인했고, 믿지 못했고, 예수의 죽음 앞에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성경에는 간간이 색다른 눈을 가진 인물들이 비치기도 한다. 아쉽게도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지 않아 나머지는 유추해야 될 지경이지만, 마리아의 향유 사건은 복음서 세 곳 (요한복음 11장 1-11 / 마태복음 26장 6-16 / 마가복음 14장 3-9 )에 꽤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그만큼 기록자들인 제자들에게나 동행한 사람들에게 확실하고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마리아는 향유를 부어 예수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이후에 예수가 죽음에 처해지고 부활한 일련의 과정에서 그녀는 어디에 있었을까? 비겁하게 부인하고 달아나고 다시 자신의 생업으로 돌아가던 제자들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가 행한 일도 기억하라'라고 한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높은 곳에 이르고, 많은 것을 취하는데 대부분의 관심이 가 있는 사람들에게 종교나 영성이라는 것도 이런 추구의 다른 방편 정도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타락이라는 현실에 마주친다. 본질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삶의 기본을 다루는 종교도 결국 삶의 숙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일인데, 일반적인 추구의 방식과 다를 바 없다면 무의미하게 되고 궤도를 이탈하게 된다. 나아가 더 극악한 영향을 사회에 미치게 된다. 마리아는 무엇을 본 것일까? 어떻게 가장 귀한 것을 다 드릴 수 있는가? 오래 예수 주위를 맴돌던 제자들과 다른 그 모습의 동기는 무엇일까? 높고 낮음에 여전히 관심이 많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온 천지에 가득한 꽃들의 저 자연스러움을 닮아내지 못하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머리로는 알지만 삶으로 체득이 되지 못하는 그 자리는 어디인가?





흔하게 보던 마리아와 유다의 장면. 마리아를 비난하는 유다에게 성경 저자는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라고 기록합니다. 이 구절 앞에서, 도둑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훔치는 것이 도둑입니다. 개나리는 진달래의 향기를 훔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훔치려 듭니다. 탐내는 것 역시 훔치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유다는 소유하려고 했다면, 마리아는 존재하려고 했습니다. 그랬기에 그에게 비싼 향유는 더 이상 아깝지 않았습니다. 온방을 가득 채운 향기는 곧 그녀 삶의 향기이기도 합니다. 존재하는 자는 향기롭지만 소유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결국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되는가 봅니다.


왜 내 것이 아닌 것을 훔치려 하는가?

내 것이라는 것이 있는가?

개나리는 그저 개나리꽃으로 피어나고 집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개나리 이상의 진달래를 탐하는가?

나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충분히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리아와 유다를 보며

소유적 관점에 사로잡힌 도적 같은 마음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질문해봅니다.

여전히 도적 같은 마음에 갇혀 있는,

꽃들의 존재방식을 닮아내지 못하는,

감긴 내 눈이 뜨이기를 소망해봅니다.


부끄러움에도

계절은 생명 잔치 가득합니다.

오늘도,

자연에게서

삶의 이치를 배워야겠습니다.

순전한 향유를 부을 만큼

순도 100%로 존재하고 싶은 봄입니다.


안타까울 정도로 빨리 지나갈 봄

봄에, 그대

존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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