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산다

저항할 수 없는 목소리 앞에

by 나모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믿음을 확인하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런 종교는 믿지 않겠어. ”


언젠가 친한 친구 중의 한 사람에게 들은 말이다. 오래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나 역시도 그런 질문을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질투하는 하나님’, ‘오직 유일한 한분이신 하나님’이란 말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는 믿음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오래 자랐다. 그래야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의 질문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차마 입 밖에 꺼내기 힘들었던 질문이었다.


익숙한 교리나 관습 등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지만, 나는 여전히 성경을 애정하는 사람이다. 여전히 매일 성경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고 있다. '읽어야 하는' 성경에서 '읽고 싶은' 성경으로 바뀌었고, 성경을 보는 시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오늘 만난 성경의 한 부분을 글로 풀어보고 싶어졌다.


창세기 22장 1절부터 18절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에게는 아이를 낳지 못하던 아내 사라 대신 여종에게서 얻은 아들들이 있었지만, 노년에 아내 사라에게서 나은 귀한 아들이 이삭이다. 말이 되는가? 제물로 바칠 동물 대신에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성경은 이런 뚱딴지같은 요구에 아무 말 없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그려낸다.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 칼을 대려는 순간에 천사를 통해 제물로 바칠 양이 준비되어있음을 알린다. 이 사건으로 아브라함은 그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인정되고 이후의 축복을 약속받는다.


가까이 다가가기에 부담스러운 내용이다. 아브라함의 내면에 집중하며 그가 하나님 앞에 가장 귀한 것을 버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다운로드 (9).jpg 샤갈. 희생장소로 가는 아브라함과 이삭



가장 귀한 것을 버릴 수 있는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세기 22:2-3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칼을 들이댄다는 일은. 아브라함이 유대인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코 그의 사람됨에 있지 않다. 그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일신을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여 아내가 곤경에 빠지게 하는 비겁하며, 비윤리적이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돌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검증받았고, 잔인한 종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한 장면의 주인공이 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감행할 수 있었던 그의 믿음은 과연 무엇인가?


그의 믿음은 가장 귀중한 것을 포기하는 믿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아내도 여럿 거느리고, 자식도 많았고, 한 부족의 우두머리로 나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삭은 여종이 아닌 아내에게서 나이 들어 낳은 첫아들이었다. 당시의 관습상 자식은 가장 큰 복이었다. 그래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의 수치를 그치게 한 이삭이었기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그는 가장 귀중한 것을 포기한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창세기 22:7-12



저항할 수 없는 목소리 앞에

아브라함은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어떤 목소리를 들을 때, 그것이 너무 확실한 목소리일 때,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일 때는 의논할 필요가 없다.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질문하고 상의한다. 하지만 어떤 목소리는 저항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 같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대해 아내 사라에게도 의논하지 않고, 믿을 만한 동료에게도 의논하지 않았다. 그만큼 저항할 수 없었던 목소리였던 것 같다.


아브라함은 피하지 않았다. 핑계를 대며 못 들은 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당히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었다. 예컨대, 여종의 아들을 드리겠다. 동물을 몇백 마리 많이 드리겠다. 아니면 좀 더 생각을 해본 후에 답하겠다. 등등.. 바로 다음날 아침에 그는 바로 출발했다. 성경은 간단한 구절로 표현하지만 아브라함도 인간인지라 어찌 내면의 갈등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그 내면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그는 바로 다음날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어떤 목소리 앞에 그것도 두려운 목소리 앞에 우리는 자주 핑계를 댄다. 그리고 미룬다. 어쩌면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다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활하게 거짓말을 꾸며 딴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와 아브라함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답을 몰라도 갈 수 있는 이유


인간의 감정을 가진 아브라함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제물을 바칠 때 쓸 나무와 제물이 될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함께 가던 이삭 역시 이상하여 아버지에게 제물이 어딨냐고 질문한다.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창세기 22:7.8


여호와 이레라는 말로 흔히 기억되는 구절이다. 알 수 없는 상황,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믿음을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 바람과 다르게 일어나는 상황 앞에서도, 놓지 않는 삶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삶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을 믿고 있었다.



행위로 입증되는 믿음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2


아브라함의 믿음은 역설적으로 이삭을 바치려는 행위로 입증되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조차 행위로 그 믿음을 보여주었다.


성경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경전 중의 하나이다. 고전작품이 오래 생명을 유지하는 이유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하물며 경전은 좀 더 근원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명되는 부분이 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읽을 수 있고, 각자에게 다가오는 울림을 전달받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목 시대라는 시간적 한계와 유대 지역, 유대인이라는 공간적 인종적 한계를 벗어나 일반적인 개념으로 이해해보면 어떨까?


우리에게 들리는 피할 수 없는 목소리가 있다.

피할 수 없는 목소리가 요구하는 것은 가장 값진 것이다.

죽을 때 산다.


아브라함이 만나는 도전은 사실 우리의 삶에서도 끊임없이 받는 도전이다. 칼을 대지 못하는 그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인가? 왜 칼을 대지 못하는가? 도전장을 내미는 목소리를 신뢰하는가? 어떤 경우에라도 삶이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는가? 다시 질문하는 오늘이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교회에서는 부활절로 기념하는 날이다. 단지 계란을 먹는 날이 아니다. 계란을 먹으며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 있다. 정작 죽어야 사는 신비를 기억해야 할 날이다. 정말 제대로 살고 싶은가? 살기 위해 무엇에 죽어야 하는가? 질문하며 보내고 싶은 나날이다.





특정 종교 안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나에게 이삭은 무엇인지?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이삭은 무엇인지? 이삭을 너머 무엇이 기다리는지? 질문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씨가 너무 좋습니다. T.S 엘리엇은 그의 작품 <황무지>에서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지만, 저는 올해 4월이 너무 좋습니다. 물론 삶에 아픔은 있지만요. 매일매일 달라지는 자연의 변화 앞에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제는 수면부족과 무거운 마음 탓에 낮에 잠을 좀 잤습니다. 일어나 창밖을 보는데 하.... 나무가 바람에 춤을 추더군요.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랑곳없는 자유로운 그들의 몸짓. 괜찮다. 괜찮다... 그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그저 바람에 자기 춤을 추는데 내 안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좋은 계절입니다. 죽음을 직시하며 삶으로 나아가는 부활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삶에도 부활을 기원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존재와 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