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bye my old friend. 신규 여권 발급 신청을 하다.
드디어 출장 각이 선다. 구체적인 '날짜'가 출국일로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논의되고 있는 출국 예정일은 열흘 뒤.
진심이신가요?.. 진심이시겠죠..
뭐, 열흘 준비 출국이 딱히 불가능하다거나 복잡한 일이 아니기는 하다. 워낙 출장에 숙달된 팀이라 당장 내일 비행기를 타라고 해도 멘탈붕괴를 겪을 짬들은 아니시고(짜증들은 좀 내겠지. 가족들이 화도 낼 거고, 미용실도 못 갔으니까!) 프놈펜은 작년에 이미 3개월 지내고 온 곳이라 웬만한 현지 사정은 이미 다 알고 있다. 게다가 캄보디아 정부 코로나19 방역조치로 현지 도착해서 2주간은 지정 숙소 자가격리이니, 격리 해제 이후 묵을 숙소를 알아볼 시간도 충분하다. 언제든 갈 수야 있죠.
출장 일정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자, 여권 신규 발급부터 처리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 여권 유효기간이 3개월 남짓 남았나. 해외여행 시에는 최소한 6개월 이상 유효기간이 남은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좋다. 외국 입국 시에 여권 유효기간이 넉넉히 남아있지 않으면 입국심사대에서 심층 인터뷰를 받게 될 수도 있고, 장기 체류 비자나 복수 비자 발급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귀찮아서 미뤄두었던 여권 발급. 사실 회사에서 걸어서 5분이면 구청이 있는데, 피하고 피해 왔지요. 여권을 챙겨서(여권 유효기간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신규 발급 신청 시 기존여권을 제시해야 한다.) 사진관부터 갔다.
사진관은 당연히 구청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찾아갔다. 10년을 함께 할 사진이라지만 더 나은 사진을 위해 조금 더 걸어야 한다면, 나는 그냥 덜 걷고 조금 더 구린 사진을 택하겠다. 그리고 여권 사진은 규정이 꽤 타이트하니까 어디서 찍든 사진에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그냥 깔끔히 입고 깨끗한 얼굴로 가면 되겠지.
그렇게 구청 바로 뒤에 자리 잡은 한 사진관에 들어가 사진사님께 여권 사진을 찍으러 왔노라 말씀드렸다. 머리를 좀 다듬고, 스튜디오 중앙 스툴에 앉았는데 사진사님 얼굴에 떠오른 저 난색. 뭐죠?
"여권 사진 찍으러 오셨다고 하셨죠?"
"네."
"어쩌죠. 여권 사진은 흰 배경에서 찍어서, 어깨선이 보이지 않는 흰 옷은 입고 찍으실 수 없어요."
아, 그렇구나. 나는 깔끔한 사진을 원했기 때문에 일부러 흰 블라우스를 꺼내 입고 왔는데, 흰 옷은 안 되는구나. 이제는 내 얼굴이 난색이 되었다. 무채색 일색인 내 옷장에서 이례적으로 컬러풀한 줄무늬의 옷은 단 하나. 색색 요란한 카디건. 그리고 이날 마침 내가 걸친 겉옷은 그 요란법석 카디건이었다. 오늘 하필 이런 옷을. 잠에 취해 얼렁뚱땅 걸치고 나온 이 카디건이 향후 10년 간 내 여권 증명사진에 걸려있게 된다- 이 말이구나. 운명은 장난꾸러기야.
"그럼 카디건 입고 찍을 게요(난처)."
"네, 앉으시죠(만족)."
알록달록 신명 나는 줄무늬의 카디건을 입은 나의 여권사진은 10분 만에 인화되어 나왔다. 이보게- 주황줄, 노랑줄 친구들- 이로써 앞으로 우리는 10년 친구라네.
따끈한 사진을 들고서 구청 여권과로 갔다. 역시 썰렁한 여권과. 민원인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2020년에는 차세대 여권이 도입 예정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코로나19로 인해 해외여행이 어려워지며 여권 수요도 따라 줄어든 탓에 아직 구여권 재고가 상당하다고 한다. 2022년에나 차세대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19의 여파는 어디까지일까. 차세대 여권 디자인 기사가 뜰 때마다 신규 발급 생각에 들떠있었는데, 할 수 없군. 운명은 역시 장난꾸러기. 한 5-6년 간은 차세대 파란 여권을 부러워하겠지만, 더 세월이 흐르면 최후의 초록 구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은밀한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라며 맘 속 눈물을 훔쳤다.
신규 신청은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본래 소지하고 있던 기한이 다 해가는 기존여권은 VOID 타공 처리 후 돌려받았다. 소중한 내 친구가 이제는 VOID라니.
이제 그녀(La pasaporte이므로 그녀라 칭해본다.)를 보내줄 때인가. 사실 해외 출장 중에나 출입국 심사대에서 어떤 돌발상황이 생길지 모르므로, 당분간은 새 여권과 함께 품고 다녀야 할 그녀이지만. VOID 낙인을 기념해서 그간의 추억을 되새김해본다. 십 년 간 내 손을 하도 타서 겉면은 닳고 내지는 누렇고 빵빵해진 그녀. 하지만 그런 모습이 아름다운 거지 뭐..
나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잃어버린 적이 없다.
그녀와 총 35번의 여행을 했다.
그중 내 돈을 들여 티켓을 끊었던 여행은 5번이다.
그녀와 27회의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그녀와의 첫 여행 행선지는 2012년, 교환학생을 위해 떠났던 멕시코였다.
그녀와 가장 오래 떠나 있었던 건 과테말라에서의 363일이다.
그녀와 가장 자주 여행했던 해는 2017년, 13회이다.
그녀와 가장 자주 갔던 곳은 11번을 다녀왔던 요르단 암만이다.
그녀와 가장 멀리 갔던 곳은, 남아메리카 페루이다. (아마도?)
그녀는 72개의 얼굴을 가졌다. (최초 발급 48면 + 사증 추가 24면)
그녀의 얼굴에는 총 114개의 스탬프/스티커가 붙어있다.
그녀와 총 22개국을 여행했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그의 저서「마음을 움직이는 순간들」에서 우리가 어떤 물건에 우리의 시간을 많이 투입할수록 그 물건에 품는 애정 또한 함께 더 자라난다고 했다. 그녀와 내가 함께 한 시간은 무려 십 년. 해외여행 한 번 해보지 못했던 스물두 살의 내가 교환학생과 해외 봉사, 인턴십을 거쳐서 서른한 살의 프로 출장러가 되기까지의 시간. 스탬프 하나하나 다 기억해내지 못할 정도로 잦았던 출국과 입국. 뒤죽박죽이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추억들. 애정을 품기에 충분히 많은 기억들이고, 긴 시간이었다. 모두 모두 함께 해준 초록 수첩 당신, 고맙습니다.
다음 주는 새 여권 찾기와 본격 출장 준비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