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 보리차를 마신다
첫 기억은 늘 오래간다. 오래 오래간다.
첫 직장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여성 상급자에 대한 기억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날카로운 감각이 찌르르르 뒷목을 타고 흐른다. 좋은 기억이 없는 탓이다.
그녀는 내 옆자리에 앉은 시니어 컨설턴트였다. 그녀가 쓴 안경알이 반사하는 모니터의 푸른빛, 꾹 눌러 닫힌 입, 차칵차칵 열 손톱들이 납작한 노트북 키보드를 바삐 튕기는 소리. 그런 것들이 선명하다. 나는 그 요란한 소리도 싫어했지만, 차칵거림이 뚝하고 끊기는 순간의 정적을 두려워했다.
"H씨,"
내가 통화를 마치거나, 팀장과 업무 이야기를 마칠 때면 그녀는 자신의 일을 잠시 멈추고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 그분과의 대화는 대체로 콜라 캔을 따는 순간처럼 톡 하고 시작해서 촤아아아-하고 보글보글 쏟아졌다. 나는 그분을 생각하면 회사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내 상사도 아니고, 같이 프로젝트를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분은 자신의 이미지와 성과를 위해 어리숙한 주니어 한 명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나중에 누군가의 사수로 일해 보면서 알게 되었다. 후임이 더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런 태도를 낳을 수 없다는 걸. 그걸 그때 알아차렸더라면, 그녀를 요령껏 추켜세워주고는 진짜 집중해야 할 것들에 정성을 쏟았을 텐데. 나의 흠결만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사람 앞에서 나는 그저 잘하려고만 했다. 누군가를 지적하는 것에서 업무 효용감을 느끼는 사람과 칭찬받고 싶어 하는 사람 둘이 붙어있었으니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머지않아 회사를 떠났고 그 이후의 회사생활은 꽤 평탄했다. 그 이후로도 여성 상사, 여성 동료 없는 직장생활이 길었다. 대부분의 프로젝트의 팀에서 내가 유일한 여성이었고 내가 막내인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번 성수 프로젝트는 달랐다. 더 이상 막내도 아니고, 홍일점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차가 쌓이니, 막내를 탈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지만 점차 많아지는 여성 동료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디서 들 계속 나타나는 거지? 특히나 이번엔 네 명의 팀원이 모두 여성이었다. PM도 여성, 팀원도 여성. 총 네 명의 팀구성원 모두가 여성이었다.
원더우먼 팀이네.
동료들에게 팀 구성을 들려주면 하나, 둘, 셋, 넷, 멤버들을 세어보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 "다 여자야?" 그것을 참 신기해했다. 내게도 신기한 일이었다. 다들 멋진 구성이라며 프로젝트 착수를 축하해 주셨지만 내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 가슴 한 구석팍을 간질였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첫 직장의 그녀가 자꾸 떠올랐다.
불안으로 인한 간지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성 PM은 그냥 리더였고, 여성 팀원들은 그냥 동료들이었다. 별다를 것도 없다.
아니, 있나? 지금까지 느낀 이 팀의 별다름이라면, 다들 인스턴트커피를 안 마신다. 한 달 전에 사둔 카누 20개입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대신 집에서 챙겨가지고 온 보리차 티백을 나눠마신다. 보리차를 마시는 팀이라니 정말 특기할만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여자들끼리 프로젝트를 나갔더니 보리차만 마시더라니까? 여자들은 보리 티백만 마셔.' 하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을까? 그랬다간 단박에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 테다.
여성들은 별난 감정과 색다른 업무 방식으로 일할 것이라는 예측은 오로지 납작한 세계관 속에서만 가능하다. 단일한 경험을 세계관 삼아 살 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내 삶은 얼마나 딱했는가. 첫직장의 그녀가 오래도록 유일한 여성 동료였다니.
나의 세계는 얼마나 작고 단출했는가. 성수가 문 하나를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