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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Jun 30. 2024

성수생활2_여자 넷이 일하면 어떻게 되는가

정답 : 보리차를 마신다

여성 상급자에 대한 기억


첫 기억은 늘 오래간다. 오래 오래간다.


첫 직장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여성 상급자에 대한 기억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날카로운 감각이 찌르르르 뒷목을 타고 흐른다. 좋은 기억이 없는 탓이다. 


그녀는 내 옆자리에 앉은 시니어 컨설턴트였다. 그녀가 쓴 안경알이 반사하는 모니터의 푸른빛, 꾹 눌러 닫힌 입, 차칵차칵 열 손톱들이 납작한 노트북 키보드를 바삐 튕기는 소리. 그런 것들이 선명하다. 나는 그 요란한 소리도 싫어했지만, 차칵거림이 뚝하고 끊기는 순간의 정적을 두려워했다. 


"H씨,"


내가 통화를 마치거나, 팀장과 업무 이야기를 마칠 때면 그녀는 자신의 일을 잠시 멈추고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Created by Dall-E

 ……. 그분과의 대화는 대체로 콜라 캔을 따는 순간처럼 톡 하고 시작해서 촤아아아-하고 보글보글 쏟아졌다. 나는 그분을 생각하면 회사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내 상사도 아니고, 같이 프로젝트를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분은 자신의 이미지와 성과를 위해 어리숙한 주니어 한 명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나중에 누군가의 사수로 일해 보면서 알게 되었다. 후임이 더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런 태도를 낳을 수 없다는 걸. 그걸 그때 알아차렸더라면, 그녀를 요령껏 추켜세워주고는 진짜 집중해야 할 것들에 정성을 쏟았을 텐데. 나의 흠결만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사람 앞에서 나는 그저 잘하려고만 했다. 누군가를 지적하는 것에서 업무 효용감을 느끼는 사람과 칭찬받고 싶어 하는 사람 둘이 붙어있었으니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머지않아 회사를 떠났고 그 이후의 회사생활은 꽤 평탄했다. 그 이후로도 여성 상사, 여성 동료 없는 직장생활이 길었다. 대부분의 프로젝트의 팀에서 내가 유일한 여성이었고 내가 막내인 생활을 했다.



여성, 여성, 여성, 여성


하지만 이번 성수 프로젝트는 달랐다. 더 이상 막내도 아니고, 홍일점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차가 쌓이니, 막내를 탈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지만 점차 많아지는 여성 동료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디서 들 계속 나타나는 거지? 특히나 이번엔 네 명의 팀원이 모두 여성이었다. PM도 여성, 팀원도 여성. 총 네 명의 팀구성원 모두가 여성이었다.


원더우먼 팀이네.

동료들에게 팀 구성을 들려주면 하나, 둘, 셋, 넷, 멤버들을 세어보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 "다 여자야?" 그것을 참 신기해했다. 내게도 신기한 일이었다. 다들 멋진 구성이라며 프로젝트 착수를 축하해 주셨지만 내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 가슴 한 구석팍을 간질였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첫 직장의 그녀가 자꾸 떠올랐다.



의외롭지도, 색다르지도 않은 성수생활


Created by Dall-E


불안으로 인한 간지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성 PM은 그냥 리더였고, 여성 팀원들은 그냥 동료들이었다. 별다를 것도 없다.


아니, 있나? 지금까지 느낀 이 팀의 별다름이라면, 다들 인스턴트커피를 안 마신다. 한 달 전에 사둔 카누 20개입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대신 집에서 챙겨가지고 온 보리차 티백을 나눠마신다. 보리차를 마시는 팀이라니 정말 특기할만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여자들끼리 프로젝트를 나갔더니 보리차만 마시더라니까? 여자들은 보리 티백만 마셔.' 하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을까? 그랬다간 단박에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 테다.


여성들은 별난 감정과 색다른 업무 방식으로 일할 것이라는 예측은 오로지 납작한 세계관 속에서만 가능하다. 단일한 경험을 세계관 삼아 살 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내 삶은 얼마나 딱했는가. 첫직장의 그녀가 오래도록 유일한 여성 동료였다니. 


나의 세계는 얼마나 작고 단출했는가. 성수가 문 하나를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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