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이 전도되고 전도되고 전도된 결과는 술주정
신년의 기운을 여전히 어루만지고 있는 2월. 이번 달에는 특히나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과 저녁시간을 보내었다. 이렇게, 저렇게 희한한 인연으로 그러모아진 저마다의 그룹 안에서 내 안색은 만화경 속 풍광처럼 변덕을 부린다. 나한테 이렇게 많은 얼굴이 있었던가.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들이다.
이날은 대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의 기획은 창대하였는데, 1박 2일의 신년 워크숍을 통해 각자 현재 고심하는 바를 말하고- 듣고, 2025년의 인생 계획을 세워보자는 것이었다. 결과를 미리 말하자면 그저 백 투 2010s.
인간관계에는 시간 관성이 작용하나? 이 친구들만 만나면 아이가 되어 버린다. 이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학생 때의 그 나이브함을 다시 꺼내보여도 여전히 용서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보니가 클라이드를 만났을 때 겪었던 내적 소란, 그 요란한 무절제함과 무대책성으로 폭죽놀이를 하며 밤을 보내고 말았다. 무조건적 관용으로 음주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인생 최대의 폭음을 했다.
친구들과는 연희동의 한 숙소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이 날 또한 나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헤매다가 D의 도움으로 숙소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길치의 인생에는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길 잃을 시간까지 셈해서 출발하는 방법과 길 찾아줄 사람과 함께 다니는 방법. 오늘은 두 번째 해결책이 날 살렸다. 같은 지도를 보는데 왜 나는 영영 도착하지 못하고, D는 한 번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곧이어 M이 도착했다. 셋이 되자마자 D가 챙겨 온 말차 깔루아에 우유를 부어 건배를 나눴다. 웰컴 드링크로 입맛 돋우기로 마시기 딱 좋다며, 짠짠. 홀짝홀짝 한 잔을 비웠다. 달달, 쌉쌀하니 좋은 오후로구나. 저녁밥은 어딜 가서 뭘 먹어야 하나, 수런거리다 말벡 와인을 오픈했다. 미니 치즈를 손톱만큼씩 뜯어먹으며 허기를 기다렸다. 출출함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취기가 찾아오겠다며 벌떡 일어나 꽁꽁 싸매 입고 숙소를 나섰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오랜 발걸음을 하지 못하고 가까운 오뎅 바에 들어가서 따뜻한 사케를 한 잔씩 마셨다. 일전에 한 허름하고 작은 식당의 추위 속에서 오들 거리며 먹었던 문어숙회를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그때랑 자리가 비슷하네. 찬바람 슬슬 맞으며 먹었던 문어숙회가 부들부들 맛있었는데. 문어숙회 이후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그새 많은 이야기들이 쌓여 있었다. 서울의 한낮 폭설 같은 것이다. 금세 두둑이 쌓였다가도, 딴청 잠시 피우고 보면 어느 샌지 제설되어 사라져 버리는. 너무 늦기 전에 이야기 눈사람을 빚어야 해. 곤약과 물떡을 추가해 먹으면서 근황 이야기를 줄기차게 나눴다.
배가 차니 슬금슬금 이성이 찾아와, '신년 계획'이라는 문을 노크했다. 똑똑. 오늘 모임 주제는 신년 계획이었답니다, 레이디들.
"근데 우리 신년 계획은 언제 이야기해?"
"여기서 말고."
그래, 자리야 옮기면 되지. 밤이 긴 걸. 한 홍콩 음식점에 들어갔다. 한산하니, 신년 계획을 안주 삼기 좋은 곳이야, 합격. 토마토 라면에 양고기 볶음을 시켜놓고 고량주를 마셨다. 아담한 파란 병에 고이 담겨 있는 모양새가, 어쩐지 진귀해 보이는 고량주였다. 몇 방울 담기지도 않을 것 같은 앙증맞은 잔에 마시려니 잔을 들기만 하면 한 잔이 말끔히 비었다.
고량주만큼이나 작고 깜찍한 신년 계획 털어놓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올해에 대학원 진학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대단한 계획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건 공부해야 할 것과, 준비해야 할 절차들이 있었다. 일단 해보고, 안 되면 다시 해보고. 그게 나에게는 최선의 계획이고, 내 삶에 대한 최대의 너그러움이었다. 한 번에 안 될 수 있으니까, 여러 번 시도해도 되니까, 일단 시작하고 멈추지 않는 것. 그래도 한 번에 해낸다면 멋들어지겠다, 하고 막연히 희망했다.
친구들의 계획은 한층 다채롭고 뭉근 묵직한 멋이 있었다. D는 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D의 To-Do 리스트는 단순히 담긴 아이템만 많은 게 아니라, 리스트 자체에 생명력이 있다. 리스트가 막 의욕적으로 증식한다니까? 누군가에게 그녀의 리스트를 물려준다면, 물려받은 사람은 경악하고 혼절하고 말 텐데, 정작 이 리스트의 주인 D는 항상 목말라 있다. 저 무거운 리스트를 이고도 디스코볼 같이 흥청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더 없을 거야... 지켜보는 나로서는 그 과잉 에너지에 살짝 두려워서 조금은 느슨해지면 좋겠단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반면에 M은 단 하나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끈덕지게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실행에 대한 기한이나 구체성은 안개구름 뒤편에 놓여있지만 어름어름 가다 보면 언젠가는 필시 손에 잡힐 꿈이었다. 확고하게 좋아할 수 있는 대상을 벌써 찾아냈다는 게 부럽다. 확고하게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 그런데, 올해만큼은 한 가지를 더 해보겠단다. 올해는 평소에 안 해본 경험을 아주 많이 해보겠다고. 나는 마주 앉은 D와 M을 번갈아 보다가 슬쩍 웃었다. 디스코볼과 안개구름. 너무 잘 어울리잖아? 둘이 이것저것 모조리 다 해보면서 다니면 되겠네. 그리고 내 역할이 뭘 지도 알 것 같아. 나는 박수꾼이야. 잘한다- 잘한다-. 안개 속이라면 나도 춤출 수 있을지도..?
작은 고량주를 두 병을 비워내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귀갓길을 휘적휘적 걷는데 오코노미야끼 입간판이 눈에 쏙 들어왔다. 분명 배불렀는데 또 군침이 돈다. "오코노미야끼... 맛있겠다...", 한 마디에 친구 둘이 호응해 준다. "그래. 맥주 한 잔만 하고 가자." 마감시간이 다 되어 주방을 닫기 직전이던 식당에 들어가 오코노미야끼에 맥주 세 잔을 시켰다. 먼저 나온 맥주 거품이 곱고 예뻤다. 호록. 이어서 나온 오코노미야끼에 마요네즈를 한 겹, 두 겹, 세 겹, 층층이 가득 얹고 있는데 M이 깔깔 웃는다. 오코노미야끼 이거 마요네즈 맛으로 먹는 거잖아. 내가 물냉면에 식초 두르는 모습 보면 아주 기절을 하겠구먼. 이런 것에 아직도 웃을 수 있다는 게 좋다.
오코노미야끼를 싹싹 비우고 숙소에 돌아왔다. 반쯤 비워둔 말벡을 다시 꺼내 마시면서 요아정을 주문했다. 요아정 처음 먹는 난데-, 5억정식으로 시작하는 사치 부려도 괜찮은지? 요아정에 샤도네를 마시는데, 시원 새콤하니 달달하니 너무 맛있고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이때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였다. 모든 술이 맛있어졌을 때...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을 때부터.
샤도네를 동내고 부족한 와인을 사러 편의점에 혼자 다녀왔던 기억, 칫솔 치약도 사 왔어야 하는데 깜빡하고 술만 잔뜩 담아와서 와장창 웃었던 기억, 내 기억은 거기까지다. 그 이후로 기억이 없다. 화이트와인을 마시며 요새 눈길이 가는 사람과의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한 기억이 어렴풋이 있는데, 친구들 말로는 그 이후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 또 또 또 이야기했단다. 그 사람 말이야, 이래서 귀엽고, 저래서 멋있고, 이래서 귀엽고, 저래서 멋있고. 무한정 주정을 부렸다고.
다음 날 아침, 친구들의 증언을 듣는 순간만큼은 뻥튀기 안주를 내어주던 대학가 술집에서 주량에 넘치게 진탕 마셔버린 그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한동안 내 술주정을 잊고 살았는데.. (질끈) 수치스러움과 욱신거림이 머리를 울렸다. 팔다리는 어찌나 무겁던지 누군가 내 몸을 세탁기에 돌리고 탈수를 까먹은 듯했다. 몸이 너덜너덜했다.
하지만 일어나야 했다. 이번 1박 2일 신년워크숍도 나름 워크숍이라고 2일 차 일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미각 미감 워크숍을 신청해 둔 터였다. 미각과 미감. 이 둔탁한 정신과 둔감한 혀끝으로 맛이라는 걸 제대로 인지할 수가 있을까, 미심쩍었지만 일어나야지... 친구들과 함께 해야지...
구토감 속 미각 미감 워크숍 이야기 to be continued...
1. 표지 사진 : KoolShooters https://www.pexels.com/ko-kr/photo/6983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