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번 짐을 꾸렸는데 단 한 번도 완벽해본 적이 없다.
뭐, 사실 나도 안다. 왜 실패하는지. 그건 쉽고 간단하다. 매번 같은 짐을 싸면서 짐 싸기 리스트 따위 절대 만들지 않고, 매번 출국 직전에 급하게 짐을 싸니까. 게다가 쓸데없는 걱정과 욕심은 어찌나 많은지, 사용하지도 않을 물건, 입지도 않을 옷도 일단 밀어 넣으니까!
이번에도 나는 출국 당일에 짐을 싼다. 18시 출국인데, 11시부터 짐을 꾸리는 나... 짐 싸는 일은 정말 정말 귀찮으니까. 실은 귀찮다는 말보다는 '하기 싫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리고 하기 싫은 일을 미루게 되는 것은 우주의 이치.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기에도 우리 하루는 각박하다고요. 그렇게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살다 보면 출국일에 짐을 싸게 되는 것이다.
짐을 쌀 때 나의 목표는 뚜렷했고, 포부는 당찼다.
'이번에는 26인치 캐리어 하나만 들고 간다! 그것이 심플 라이프!'
이번 캄보디아 출장 기간은 2개월 남짓. 꽤 긴 시간인 만큼 무언가 생활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그러자 내 머릿속에 두둥실 떠오른 이상은 '삶의 간소화'. 생명 존중을 실천하고 싶어서 채식을 지향하려는 노력을 해온지도 벌써 1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많이 실패하고 있지만, 삶에 채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요즘은 지구 온난화나 미세 먼지와 같은 환경 문제로 인해 더 잘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커지고 있다. 내가 이 비천한 목숨 하나를 지탱하고자 소모하고 있는 이 많은 자원과 생명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아파진다. 그래, 나는 작게 살고 싶어!
하지만, 짐은 절대 줄거나 가벼워지지 않았다. 작년(2020)에는 코로나19에 대한 방역 조치가 한창 삼엄하던 때라 자가격리 2주 간 먹을 음식을 챙겼었지만, 올해(2021)에는 자가격리 조치가 해제되어 음식은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짐은 여전히 넘치고 있지? 가서 새로 사서 쓰는 일이 없도록 되도록 집에 있는 것을 가지고 가자, 라는 생각 덕분에 짐이 계속 늘어났다. 신발이며 외투며 넣을 것이 아직 한참 남아있는데 결국 기내용 캐리어를 하나 더 꺼냈다. 심플하기 참 어려운 인생이다.
나에게 짐 싸기는 이제는 어느 정도 기계적인 일이 되었다. 매번 싸다 보니 먼저 챙겨 넣는 물건의 순서와, 위치까지 대략적으로 정해져 있다. 제일 처음에는 옷장을 열고, 출장국 계절에 맞는 블라우스들을 꺼낸다. 침대 위에 블라우스들을 겹쳐 펼쳐 놓고, 돌돌 만다. 한 장 한 장 개어서 넣는 것보다, 겹쳐 놓고 굴려 마는 것이 더 부피가 훨씬 적고, 옷에 구김도 덜 간다.
차례로 옷가지들을 챙기고, 화장실과 화장대에서 세안 용품과 화장품들을 챙긴다. 가방이 어느 정도 채워져서 짐 싸기가 마무리되어간다 싶을 때, 신발과 먹거리들을 챙겨 넣는다. 신발이랑 먹을 건 좀 없어도 살만하다. 세 시간 정도면 짐을 다 싼다. 생각보다 빠르지 않은 이유는 하기 싫은 마음을 중간중간 달래기 위해 잠시 쉬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계적 짐 싸기에 숙달되어도 짐 싸기는 괴롭고, 짐의 규모는 줄지를 않는다. 왜냐 대체..
솔직히 이번에는 다 챙겼을 줄 알았어. 정말로. 정말로 무거웠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빠진 아이템들은 있다. 심지어 많다. 참나.
나.. 환경 친화적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야.. 아마도 그럴걸.. 받은 비닐봉지는 잘 모아서 가지고 다녀야겠다. 조금이라도 덜 쓰기, 한 장이라도 줄이기.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에도 최선을 다하자.
안 가져와도 괜찮을 줄 알고 안 챙겼는데, 없으니까 너무나 불편하다. 출장 시에는 현금 사용할 일이 많아서 늘 장지갑을 사용한다. 혹시라도 모를 소매치기를 조심하느라 지갑만 덜렁 들고 다니지 않으고 한다. 그런데 작은 가방이 없으니 어딜 가더라도 본격적인 가방을 메고 다니게 된다. 다음 출국 때는 TUMI 크로스백 꼭 하나 사기로 해. 간소화 vs. 물욕의 대결에서 때로 물욕의 손을 들어주는 나.. 그것은 인간적 모순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거실 TV에 있던 크롬캐스트를 야무지게 뜯어왔는데, 리모컨을 안 가지고 왔네..? 말이 돼?
신발을 여덟 켤레를 챙겼는데, 그중에 굽 없는 검정 로퍼가 없다는 게 말이 돼? 안 돼...
바디 워시, 바디 로션 다 챙겨놓고 샤워볼은 안 가져온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안 된다고요.
한국처럼 수돗물이 맑은 나라가 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수압도 부족한 숙소들이 많다. 필터가 달린 샤워헤드는 두 가지 걱정을 동시에 만족시켜준다. 물이 필터에서 한 번 걸러져 나오고, 촘촘한 분출구 덕분에 수압도 세진다. 여러모로 샤워헤드를 따로 챙기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운데, 이번엔 까먹고 말았다.
한 만 원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까먹고 안 챙겼다. 쓰다 남은 현지 화폐 이야기를 하니까 한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한 출장자가 5년 만에 한 국가를 다시 가게 되어서 당시에 못쓰고 가지고 있었던 화폐를 고이 가져오셨었다. 그런데 그 간 화폐개혁이 있었어서, 그가 가진 구권은 어디서도 사용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은행에서도 바꿀 수 없었다. ㅋㅋ. 아니 근데, 나는 그 와중에 커피집 적립 쿠폰 카드는 챙겨 왔네. 인간의 이런 비일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외에도 분명 빼먹고 안 가져온 물품이 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써는 이 정도의 아이템들이 잊힌 채 한국에 체류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내 짐 싸기가 왜 실패하였는지 자가진단을 해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아마 같은 실수를 또 반복할 테지. 왜냐면 나는 일관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니까.. 다음번도, 그다음 번도 나는 출국시간이 임박해서야 짐을 꾸리기 시작할 것이고, 오로지 나의 기억과 감각에 의존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실수.
백팩
여권
지갑 (신용카드, 체크카드, 외화)
입국 수속 서류 (코로나19 예방접종 증명서, 보험증서 등)
노트북
태블릿
전자책 (리디페이퍼)
이어폰
핸드폰 & 노트북 충전기
휴대용 배터리
텀블러
우산
펜
파우치 (치약, 칫솔, 수분크림)
(돼지코)
출근용 의류
가벼운 재킷
단정한 카디건
블라우스
정장 바지
일상용 의류
외투
민소매 상의
청바지
면바지
원피스
(모자)
운동복 & 용품
반팔티
레깅스
스포츠 브라
수영복 & 수영모 & 수경
(세라밴드)
(요가매트)
속옷
이너 끈나시
브라 & 팬티
잠옷
양말(긴 것, 덧신)
신발
출근용 구두
스니커즈
운동화
실내용 슬리퍼
외출용 슬리퍼/샌들
가방
숄더백
(미니 크로스백)
(장바구니)
(짐가방)
의약품
복용약
영양제
마스크
화장품
스킨케어용
메이크업용
향수
화장실
세안 제품
바디워시 & 로션
샴푸 & 린스
(샤워볼)
치아 위생용품 (칫솔, 치약, 치실, 혀클리너)
눈썹 칼, 면도기
수건
생리대
(샤워기 필터)
전자/전기 제품
노트북
태블릿
전자책
헤어드라이어
크롬캐스트 & (리모컨)
충전기 및 케이블
멀티탭
커피
전동 그라인더
커피 드리퍼
커피 주전자
여과지
원두
(커피포트)
식량
라면
캔 죽
인스턴트 떡국 (최애)
누룽지
인스턴트커피
기타
옷걸이 (바지걸이 필수)
수저
반짇고리
문구류 (스테이플러, 클립, 가위)
읽을 책
이제 앞으로는 본격적인 출국 이야기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