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 신청, 덤덤한 수다, 출장 준비물. 그 모든 것과 커피.
지난 월요일, 캄보디아의 국가 방역지침이 변경 발표되었다. 예방접종 완료자는 자가격리가 면제된다. 관광비자 발급도 다시 재개했다. 확실히 이제 위드 코로나로 나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소식이 들리자마자 사무실이 잠시 소란해진다.
캄보디아 대사관은 시청역 인근에 있다. 마음 같아서는 출근길에 들러서 이동 시간을 아끼고 싶지만, 팀장님 의견은 달랐다. 그냥 '지금', '얼른' 다녀오는 게 마음 편하지 않겠느냐고. 회사서 시청까지 왔다-갔다- 하느니, 출근길에 잠시 들렀다 오는 게 편하겠다는 속마음은 구겨 넣기로 한다. 내 마음을 우겨서 뭐하나. 더 이상의 생각은 그만, 그냥 오늘 다녀오자.
비자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챙겨서 11시쯤 회사를 나섰다. 나가는 김에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바람이라도 쐬고 올 요량이었다. 시청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간은 커피앤시가렛이다. 커피앤시가렛은 시청역 9번 출구, 유원빌딩 17층에 위치한 카페다. 고층에 큰 창이 시원하게 나있어서 서울 시내를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마침 단풍이 한창일 철이고, 하늘마저 맑았다. 비자 업무를 마치면 바로 커피앤시가렛을 가야겠다.
캄보디아 대사관은 예상보다 더 많이 북적거렸다. 입국 시 자가격리 제한이 완화되자마자 입국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았다. 비자 신청 서류를 접수하는데 점심시간 이후 찾으러 오라고 할까봐 조마조마했다. 일찍 올 걸 그랬나? 그래도 다행히 대사관 점심시간 이전에 비자 발급이 끝났다. 비자 업무가 끝나자마자 망설임 없이 커피앤시가렛으로 발걸음 했다.
뷰 좋고, 맛 좋은 커피앤시가렛은 월요일 12시에도 북적였다. 창가 자리에 앉는 영광은 오늘도 누리지 못했다. 뭐, 창문에 꼭 바싹 앉을 필요가 있나. 멀직이서도 충분히 선명하고 시린 풍경이었다.
커피를 받고는 자리에 앉아서, 여권을 뒤적여 봤다. 한쪽 면을 꽉 채워 차지하고 있는 캄보디아의 단수 비자. 새 여권의 첫 흔적은 캄보디아가 되었구나. 진짜 가긴 가나... 항공권 예매도 며칠 전에 마쳤고, 비자도 발급받았지만 영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잠깐의 짬이지만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요즘 책 읽을 짬이 잘 나지 않아서, 이런 조각 쉼이 참 소중하다. 펼친 책은, 에스터 페렐의「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누군가의 강렬한 후기를 읽고 나서 궁금해져서 리디셀렉트에 있길래 담아둔 책인데, 읽어보니 오로지 불륜만에 대해서 탐구하고 있는 책이었다. 누구의 어떤 후기를 읽고 이 책이 궁금했던 거지? 모르겠고, 상념을 곁들인 커피 한 입은, 참 고소하다.
출국 D-2, 금요일. 출국 전 마지막으로 사무실 출근을 한 날, 나른한 오후. 직장 동료들에게 슬쩍 커피 마실 시간이 되는지 물었다. 다들 바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흔쾌히 시간들을 내주셨다.
나까지 넷이 회사 같은 건물 1층의 카페로 몰려갔다. 워낙 해외출장이 만연한 팀이라 분위기가 한껏 무덤덤하다.
"갔다 언제 오세요?"
"내년 1월 말이요. 2개월 조금 넘게 있다 와요."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이런 식의 간결한 덕담이 잠시 오고 간 뒤, 관등성명하듯이 각자 향후 출장 계획을 공유했다. 역시 분위기는 무덤덤. 아, 다음 주에 인도네시아 가시는구나. 어, 케냐 가실 수도 있으시다고요. 건강하세요... 내년에 뵈어요...
출국 D-1, 토요일. 조금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오전에는 SQLD 시험을 치렀고, 점심에는 친구를 만났다. 같이 떡볶이로 점심을 한 끼 하고, 커피를 마시러 병맛커피에 갔다. 병맛커피는 원당 시장에 위치한 작지만 다양한 스페셜티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알찬 공간. 좋아하는 공간이라 자주 가지는 못해도 인근에 갈 일이 있으면 한두 번씩 가곤 한다.
나는 커피 좀비 직장인이라서, 어딜 가든 아침 커피는 꼭 챙겨 마신다. 단기 출장은 호텔에서 묵으니 조식 먹으면서 챙겨마시지만, 이번 출장은 아파트를 구했기 때문에 커피를 내려마실 수 있도록 커피 드리퍼와 주전자, 전동 그라인더 등 핸드드립 용품을 챙겨갈 생각이다. 프놈펜에도 Treehouse Cafe나 Percent Coffee (% Arabica)처럼 썩 좋은 원두를 구할 곳이 있지만, 첫 주에는 아무래도 이리저리 다니기 어려울 것 같아서, 한 주 치 원두도 준비해 가기로 했다.
나의 선택을 받은 커피는 코스타리카 El Tanque Yellow Honey Whisky Aged. 이름처럼 위스키 오크 향이 명확하게 느껴지고, 여운이 달큰하고 길다. 목으로 넘기고 나서도 한참 입안을 따뜻- 부드럽게 감도는 잔향이 기분 좋은 커피다. 오스트리아의 모차르트 초콜릿에서 느꼈던 고소한 향이 생각난다. (서치 해보니 모차르트 초콜릿엔 아몬드로 만든 marzipan과 누가, 피스타치오가 들어간다.) 친구는 두리안 맛이 난다고 했다. (ㅋㅋㅋ) 실제로 두리안을 처음 입에 넣었을 때 느껴지는 톡 쏘는 듯한 발효향이 알싸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나 같은 개손이 내려도 맛있기 때문에 구매!
출국 D-1.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출국 준비(짐싸기)를 해야 한다. 출국 디데이에 짐 꾸리는 나... 할 수 있다... 문제없다... 절대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오늘까지는 그냥 푹 쉬고 싶다.
본격 출격 스토리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