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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Aug 28. 2022

내가 꿈꾸던 해외 출장의 실체

다시 3주간 프놈펜

또각또각, 검은 스커트 정장 차림으로 콤팩트한 은빛 캐리어를 미끄럽게 끌고 공항에 들어서는 여성이 있다. 모든 절차에 능숙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한치의 망설임 없이 내뱉는 영어와 어딘가 찌푸린 데도 활짝 펼쳐진 데도 없이 시종일관 무덤덤한 표정. 내가 대학시절 꿈꾸었던 해외 출장자의 모습은 그랬다. 나는 해외를 누비며 일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국경을 넘나들며 해야 할 일이라면, 어쩐지 특별하고 중대한 일을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년, 나는 해외 출장자가 되기는 되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해외 출장자가 되었는가.


일단 내 캐리어는 거대하고 빨개...

내 이상 속 캐리어는 알루미늄 재질의, 번쩍번쩍한 기내용 캐리어였다. 그렇지만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이후에 나는 눈에 확 뜨이는 색상의 캐리어를 구해 쓰기 시작했다.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를 돌고 도는 수많은 캐리어 중 '내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최고라는 사실을 납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랜짓 중에 내 캐리어가 분실이라도 된다면? '제 캐리어는 은색에.. 검은색 네임태그가 붙어 있어요' 보다는 '제 캐리어는 빨간색이에요!'가 명확하지 않던가.


캐리어에 대한 나의 로망은 색상에서 뿐 아니라 사이즈에서도 기대를 저버렸다. 기내용 캐리어라니. 나로서는 출장 기간이 아무리 짧더라도 그 작은 기내용 캐리어에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담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번 출장은 3주. 그나마 이번 출장은 26인치 캐리어 하나에 백팩 하나로 짐이 콤팩트한 편이다. 2020년부터 한해에 못해도 3개월은 보냈던 프놈펜으로 다시 가는 출장이라서, 강박적인 불안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짐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소에 무엇이 구비되어 있고, 무엇이 부족한지 이미 알고 있었으며, 혹여나 급히 필요한 물품이 생긴다 해도 어디에 가면 그 물품을 구할 수 있을지, 손쉬운 방안을 이미 알고 있으니 진정된 마음으로 짐을 덜어낼 수 있었다.


또각또각...? 찰싹찰싹!


물론 캐리어 안에는 구두 몇 켤레가 들어있다. 그렇지만 공항에 갈 때는 절대로 구두를 신지 않는다. 공항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발권이며 환전, 출국 심사, 면세품 인도, 출국장 면세 쇼핑, 커피 타임 등 공항 안에서 걸어야 할 일이 넘친다. 내 몸은 편안함이 멋을 굴복시킨 지 오래다. 공항 안에서의 활동을 생각하면 운동화가,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열 발가락 모두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슬리퍼가 최고다. 비행기가 뜨고 나면 기압 차 때문에 발이 붓곤 해서, 발이 동여매어지는 신발은 피한다. 트랜짓 공항의 검색대에서 신발을 벗기까지 해야 할 경우를 생각하면 나는 운동화마저도 귀찮다. 겨울 나라로 출장 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언제나 슬리퍼를 신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뒤꿈치를 쫀득하게 때리는 슬리퍼 말이다.


타닥타닥...? 사락사락!


그리고 또 현실과 다른 한 가지는, 해외 출장자라면 공항에서나 비행기에서 노트북으로 열정적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이다. 물론 스케줄이 살인적이고 못 끝낸 업무가 있을 경우에는 그렇게라도 일을 해야겠지만.. 다행히도 그런 슬픈 경우는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처음 출장을 다니기 시작했을 적에는 기내 엔터테인먼트를 어떻게든 누리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질려버렸다. 물론 5-6년 전까지만 해도 유선 이어폰을 챙겨 다녔기 때문에 괜찮은 음색으로 영화와 음악을 들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블루투스 이어폰만 가지고 다니게 되면서 기내 엔터테인먼트는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조잡한 이어폰으로 밖에 즐기지 못하게 된 탓도 크다. 이제는 스마트폰에 미리 다운로드하여 둔 '내'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을 더 선호한다. 심지어 이제는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매하고 다운로드를 해 둘 수 있게 되면서 책을 직접 들고 다닐 필요도 없어졌다. 게다가 통신이 단절된 공간에서는 독서에 몇 배는 더 수월하게 집중을 할 수 있다.


기내 식사는 여전히 즐겁다



기대와 같은 유일한 현실은 기내식이랄까. 해외 출장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비행기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 자체로 즐거웠던 것 같다. 대한항공 기내식으로는 비빔밥만 주구장창 먹었고, 음료는 무조건 토마토 주스나 탄산수를 마셨었다. 어쩐지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트랜짓 항공편의 기내식을 고대하곤 했다. 다양한 국적기를 타고 다니다 보니 여러 항공사들의 기내식을 먹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비빔밥, 고깃덩어리, 짜거나(토마토 주스) 단(오렌지 주스)에 질려버린 순간이 왔던 것 같다. 동물권과 환경에 대한 책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제는 특별식으로 채식 기내식을 미리 신청해 놓고 어떤 멋진 채식 음식이 나올까! 기대하는 맛으로 비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술을 곁들여 얻을 수 있는 취기는 덤.


이날은 야채 꾸스꾸스가 나왔다. 꾸스꾸스는 튀지니 출장 중에 참 자주 먹던 음식이었다. 뭉근하게 쪄서 나오는 각종 야채들과 채즙이 가득 베인 소스가 맛있어서 어느 때건 메뉴에서 꾸스꾸스가 보이기만 하면 시켜서 먹었더랬다. 어느 날 점심식사 때 현지 기관 국장님이 가만히 나를 보고 있다가 내가 어김없이 꾸스꾸스를 주문하는 걸 듣더니 깔깔 웃으며 자지러지시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튀니지 사람들에게 꾸스꾸스는 만찬에 어울리는 무거운 음식이라는 인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덩치도 작고 조그만 내가 매 점심때마다 꾸스꾸스로 과식하는 게 신기하고 웃겼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꾸스꾸스 리(Couscous Lee)가 되어버렸다. 그 꾸스꾸스를 비행기에서 다시 먹게 되다니. 어른이 되면 문득문득 나의 인상에 발을 걸고넘어지는 추억들이 이렇게나 많아진다!


비행기 옆 사람과의 로맨스는 요원하고요.

<우리도 사랑일까>의 주인공들이 비행기에서 다시 마주치게 되는 장면

해외 출장에 익숙하지 않았을 때엔 옆 자리에 잘생긴 사람이 타기를, 하고 바라던 날이 많았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 2011> 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고, 실망이 계속되면 포기하게 되는 법. 이제는 내 자리를 침범하지 않으며, 어떤 특정한 냄새나 향이 나지 않는 무취 인간이 타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비행기에 자주 오르면서 어렴풋이 느끼게 된 점이라면, 의외로 내 또래의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내가 체감하는 승객의 평균 연령은 45세 전후 정도다. 옆 자리에 잘생긴 사람은 커녕 또래가 앉는 일도 드물다.


이번 프놈펜행 비행에서는 옆자리에 수다스러운 미국인 여성이 앉았다. 엄청난 친화력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다른 승객과 말을 나눌 정도였는데, 그의 친화력에는 나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비행의 잠시 잠깐씩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인천을 경유해서 프놈펜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태생과 성장 모두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했는데, 더 많은 기회와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몇 년 전 남편과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시민권을 취득했다고 했다. 이제 여섯 살이 된 아이는 부모님 손에 맡기고 떠나 있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지금 3년째 캄보디아를 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3주간 머물면서 오랜만에 가족들을 보고, 아이를 미국으로 데려갈 예정이라고 했다. 3년 간의 미국 생활 중 겪은 고통과 슬픔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가 처음 미국에그의 엄청난 결단력에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입국심사 서류를 미리 받아 쓰는 때엔 그가 자신의 방문 목적을 어떻게 작성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물어왔다. 우리 둘은 고심 끝에 'Tourism'을 답으로 골랐다. 그는 더 이상 캄보디아인이 아니라 미국인이었으니까. 


5성급 호텔은 무슨. 취사 가능한 아파트가 최고


가장 큰 착각은 내가 5성급 호텔에 머무르며 해외 이곳저곳을 누릴 수 있을 것이란 상상 아니었을까. 업무상 출장에서 사원들이 가장 흔히 찾는 호텔은 3성급의 호텔이라는 것을... 3성과 5성의 숙박비 차이를 나는 그때 몰랐다. 이제는 안다. 내가 가진 미약한 재력으로는 5성급 호텔의 숙박비를 부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재정적 고통을 유발하는 일인지... 그리고 일주일이 넘는 출장이라면 주방은 필수라는 것을....



출장이 길어질수록 취사가 가능한지 여부가 생활의 질을 결정한다. 아름다운 인테리어나 조식, 수영장은 긴 기간의 해외 생활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제는 주방과 세탁기를 갖추고 있는 seviced apartment를 가장 선호하게 되었다.


늘 묵던 그 숙소에 당도해서 내 빨간 캐리어를 털퍽 펼쳐 놓고 나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도착했구나.


프놈펜에서의 생활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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